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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87036890
· 쪽수 : 160쪽
· 출판일 : 2019-01-28
책 소개
목차
차례
책머리에·5
목격자 / 수레 / 고행 / 속죄양 / 천상의 옷 / 잃어버린 새 / 바닥 / 거인 / 다락방 / 멀리서 온 편지 / 뜨거운 책 / 돌아온 탕아 / 유훈(遺訓) / 시인 / 추격자 / 친절한 모자 / 꿈속의 공장 / 긍휼한 세계 / 석상(石像) / 방아쇠 / 황금시대 / 순례자 / 어미 / 덕구 약전(略傳) / 옛사랑 / 장밋빛인생 / 잠언의 날들 / 재단사 / 수집가 / 불안한 잠 / 은둔의 성 / 탄생 / 목발의 바다 / 형벌 / 불의 얼굴 / 미약한 앎 / 밤의 여왕 / 엄마 없는 하늘 아래 / 코니의 책 / 무심코 지나간 바람 / 빛의 제국 / 멈추지 않는 풍차 / 아비 / 구석 / 배달부 / 동행자 / 누구도 아파선 안 돼 / 검정깃털 / 교실 / 숨 멎는 날까지 / 증인 / 딴생각 / 경솔한 눈 / 등불의 현자 / 겨울 / 혁명가 / 하인의 태만 / 암투 / 약점 / 책상 앞에서 / 우주적 손
맺으며·158
저자소개
책속에서
누군가는 그것을 떠맡아야 했다. 어깨뼈가 으스러질지언정 무거운 그것을 짊어지고 있어야 했다. 신의 경고는 엄중했다. 만일 그것을 내려놓는다면, 하늘의 기둥이 무너져 세상이 끝장나게 되리라고. 신의 명령을 거역하기엔 그는 초라한 개인에 불과했다. 무지막지한 신의 횡포를 막아서기엔 너무도 미약한 존재로 태어났다. 그래서 심각하게 두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그는 버텼다. 다행히 하늘은 깨지지 않았고, 누구도 화를 면할 수 있었으며, 비로소 신도 안도할 수 있었다. 그에게 물 한 모금이 얼마나 절실했으랴. 시시각각 땀이 홍수를 이루고 맹수처럼 허기가 달려들었지만 그는 어깨의 짐을 내려놓지 않았다. 신의 엄포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고 싶지 않은 때문이었다.
당신 품에 안겨 있을 때 우린 젖먹이였다.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조그만 울음보에 불과했다. 그래도 그 울음소리 하나는 얼마나 크고 우렁찼던가. 그것만으로도 당신의 뜨거운 사랑을 갈구하기에 충분했다. 극진한 당신의 보살핌이 있던 시절 세상은 얼마나 따사롭고 포근하며 아늑했는가. 당신의 무릎 위에서 우린 더듬거리며 지상의 언어를 익혔다. 비틀거리는 첫걸음 역시 당신의 발치 앞에서 뗐다. 밀물처럼 닥쳐온 검은 저녁, 당신이 들려준 나직한 자장가 덕에 긴 밤의 나락을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 당신과 우리를 이어준 한 가닥의 놀라운 줄. 그렇게 우린 당신과 우주적 끈으로 묶였다. 끝을 모를 광대한 우주에 그만한 기적이 어디 있는가.
예기치 않게 그가 방문하곤 한다. 문턱에 걸터앉자마자 그는 떠벌리기를 좋아한다. 맹랑하긴 해도 엎지른 꿀단지처럼 그의 허언(虛言)은 달콤하다. 놀랍도록 부드러운 혓바닥과 썩 듣기 좋은 목소리를 그는 지녔다. 주저 없이 비밀스런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하는 그 눈동자는 얼마나 그윽한가. 우물처럼 깊은 그 속에서 미처 숨기지 못한 그의 간교한 성품을 읽을 수 있다. 그럼에도 멱살을 움켜쥐는 손아귀의 힘은 얼마나 센가. 그것에 붙들리면 일단 놓여나기가 힘들다. 분간하기 어렵도록 그는 매번 모습을 바꾸고 나타난다. 셀 수 없는 무진장한 것들이 그에게는 있다. 무엇이든 소유하지 못한 것들을 그가 다 지니고 있기에 아쉬울 때가 많다. 악마들이 부지런히 암약하는 이유를 그것에서 찾을 수 있겠다. 며칠 전에도 아무런 예고 없이 그가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