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87798330
· 쪽수 : 364쪽
· 출판일 : 2017-12-29
책 소개
목차
1987년 봄 / 싸대기의 여자 / 청천벽력 같은 소식 / 빨간 팬티의 남자 / 가슴 없는 여자가 여자냐 /
거래 / 좌충우돌 / 라비앙 로즈 / 불심 검문 / 그 남자의 이중생활 / 빤스에 불나게 시작해볼까 /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훨씬 많아 / 어서와, 남자는 처음이지? / 두 얼굴의 남자 / 혁명하기 어려워 / 사랑을 하면 알게 되는 것 / 거기 있어줘, 멀리 가지 말고, 딱 거기에 / 추워서 못하겠어, 혁명 / 이젠 됐어, 떠날 시간 / 사랑을 하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 살인 / 프락치 / 기다려 내가 그 쪽으로 갈게 아니 내가 갈게 / 정의는 항상 막판까지 외로운 거야! / 별들이 온 힘으로 굴러서 해는 떠오르고
작가후기 등 뒤에서 들려오는 둔탁한 발자국 소리, 1987년
부록 1987년 풍물지
저자소개
책속에서
그 순간 노란 포니 택시가 버스 앞에 끼어드는 바람에 버스는 다시 급정거했다. 그때를 틈타 너구리의 손이 다시 솔잎의 가슴으로 왔다. 이에 솔잎의 고개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홱 돌아가고 말았다.
“아저씨!”
솔잎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버스에 탄 사람들이 모두 솔잎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너구리는 식용유가 흐를 것 같은 느끼한 표정이었다가 약간 놀란 표정으로 변했다. 너구리는 뒤로 살짝 물러나는 듯하더니 다시 정색했다.
“어딜 만져요! 어딜?”
“아니, 내가 만지긴 어딜?”
“여길 만졌잖아요! 지금!”
솔잎은 제 가슴을 가리키며 니글거리는 너구리를 째려보았다.
“아이고, 이 아가씨가 무슨 대포를 삶아 먹었나? 여자가 왜 이렇게 목소리가 커? 그리고, 내가 어딜 만졌다는 거야? 만지긴?”
“아저씨야말로 미꾸라지를 삶아 먹었어요? 왜 발뺌하세요? 어딜 빠져나갈려고?”
솔잎은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우렁찬 가슴에 우렁찬 목소리였다.
남자들은 정말 왜 이런지 모르겠다. ‘어디 손을 갖다 대?’
그러는데 너구리가 한 수 먼저 치고 나왔다.
“이 계집애가 어디서 뼁끼칠이야? 어디서 생사람을 잡아?”
약이 오를 대로 오른 솔잎은 악을 쓰듯 말했다.
“이 아저씨가…… 아저씨, 변태야?”
“야, 이번에 들어오는 15기들. 진짜 킹카얏!”
서클룸에 들어갔을 때 ‘체 게바라’ 형이 난리였다.
체 게바라는 그의 별명이다. 그의 별명이 체 게바라가 된 것은 언제나 체 게바라의 얼굴이 프린트된 티를 입고 다녔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의 영웅. 해방을 위해 싸운 인도적 지도자. 체 게바라.
베레모에 검게 자란 머리카락. 검은 턱수염. 우수에 젖은 눈빛.
체 게바라의 얼굴은 레지스탕스의 고독과 신념을 느끼게 한다.
게바라 형이 체 게바라의 얼굴이 프린트된 티를 입고 다니는 건 어떤 지조 같은 거였는지도 모른다. 지켜야 될 것을 잊지 않고 있다는 나름의 신조.
그렇다고 ‘체 게바라’라고 글씨가 쓰인 티를 그냥 입고 다닐 수는 없었다. 얼굴까진 되지만 글씨까지 쓴 티를 입고 다니면 짭새에게 잡혀갈 일 순위였다. 그렇다고 고문대에 앉아 혁명가를 부를 폼 나는 전사가 될 수도 없었다. 체 게바라 형은 전사라기보다는 전사를 흉내 내는 자가 되고 싶을 뿐이었다.
그는 ‘체’ 자를 티에서 꼼꼼히 지웠다. 티에는 ‘게바라’라는 글자만 외롭게 남았다.
게바라는 늘 혁명가 운운했지만 순전히 겁쟁이였다. 봉수는 그걸 잘 안다. 가투가 있을 때마다 게바라는 겁에 질려 서클룸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체 게바라의 혁명 사상을 떠들고 다니면서 정작 두려운 거다. 그가 입고 다니는 티는 두려움을 감추기 위한 방패인지 모른다.
다이아몬드 성냥갑에서 성냥 한 개비를 꺼낸다.
솔잎은 석유곤로 앞에 쪼그려 앉아 곤로에 불을 붙인다.
연희동 하숙집 이층 부엌 칸막이는 판자로 되어 있다. 판자를 엮어 이층 베란다에 간이 부엌을 만들어놓은 것이다. 씻을 때마다 찬 바람에 소름이 돋았다. 판자때기 사이에서 바람이 솔솔 불어 들어온다.
“물 데워놓은 거 있다. 연탄 위에 봐라.”
부엌문과 연결된 방에서 은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자 말대로 연탄불 위 양동이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솔잎은 오늘 더운 물이 더 필요할 것 같았다.
“가시나. 아침에 머릴 감아놓고 와 또 감노?”
은자는 방에 드러누워 있었다. 벽에 다리를 올려놓은 채로. 종아리 살을 뺀다나 어쩐다나. 얼굴에 아모레에서 나오는 영양팩을 올려놓은 채였다.
은자는 오늘 오락실에서 최고 점수를 땄다며 마구 자랑을 늘어놓았다. 99만 9990점. 대단한 점수였다. 김해에 있는 은자 엄마가 이 사실을 안다면 ‘내 딸이 학점이 아닌 갤러그 점수를 따기 위해 얼마나 많은 50원짜리를 갖다 바쳤을까’ 생각하며 가슴을 칠 것이다. 현란한 갤러그 화면처럼 ‘뿅뿅뿅’ 총이라고 쏴주고 싶을 것이다.
“대회에 나간다카이 막 관리 들어가능갑네. 으잉?”
은자는 부엌문 너머에 있는 솔잎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유리창으로 보이는 언덕 아래 집들의 불빛이 유리알처럼 반짝였다. 은자는 종아리를 벽에 올린 채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따라 흥얼거렸다. 혜은이의 ‘열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