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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과학소설(SF) > 외국 과학소설
· ISBN : 9791188547098
· 쪽수 : 368쪽
책 소개
목차
프롤로그
풀의 죽음
해설
리뷰
책속에서
“하지만 ‘어쩌면’ 다른 누군가도 그 정보를 가졌을 수 있어. ‘어쩌면’ 우리를 구할 또 다른 수단이 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문제의 바이러스가 스스로 알아서 사멸할 수도 있고, ‘어쩌면’ 그보다 먼저 전 세계가 태양에 빨려 들어갈 수도 있지. 그렇다면 나는 아무런 의미도 없이 일자리만 잃은 셈이 되겠군. 그걸 정치적 용어와 정부의 수준으로 바꿔 표현하자면 이런 거야. 만약 우리가 바이러스를 저지할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유일하게 이치에 닿는 일은 바이러스가 휩쓸 만한 땅에 모조리 감자를 심는 거라고 말이야. 하지만 바이러스를 저지할 수 없다는 사실은 과연 어느 단계에서 판정되어야 하는 걸까? 그리고 만약 우리가 잉글랜드의 푸르고 쾌적한 땅을 온통 감자밭으로 바꿔놓은 다음에야 비로소 누군가가 바이러스를 없애는 데 성공한다면 어떨까. 자네가 상상하기에는 그다음 해에 빵 대신 감자를 제공받은 유권자들이 뭐라고 할 것 같아?”
“그들이 뭐라고 말할지는 모르겠지만, 뭐라고 말해야 마땅한지는 확실히 알지. ‘감사합니다, 하느님. 우리도 중국인처럼 서로를 잡아먹어야 하는 상황까지 떨어지지는 않게 해주셔서’라고 말해야겠지.”
“오늘 중으로 런던을 비롯한 모든 인구 밀집 지역의 외곽에 군대가 배치될 거야. 내일 새벽부터는 도로도 모두 차단될 거고.”
존이 말했다. “그 양반이 생각해낼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 그것뿐이라니……. 세상 모든 군대를 다 동원한다 치더라도, 도시 하나가 굶주림의 압력을 못 이기고 사방팔방으로 터져서 흩어지는 걸 막지 못할 텐데. 그 사람은 도대체 그렇게 해서 무슨 이득을 보겠다는 걸까?”
“시간이지. 자신의 두 번째 실천 과제에 대한 준비를 완료하기 위해 필요한 그 귀중한 일용품을 충분히 벌겠다는 거야.”
“그 실천 과제라는 게 뭔데?”
“우선 소도시에는 원자폭탄을 한 개씩, 리버풀과 버밍엄과 글래스고와 리즈 같은 대도시에는 수소폭탄을 한 개씩, 그리고 런던에는 수소폭탄을 두세 개쯤 떨어트리는 거지. 그 정도로 무기를 남용해도 아무 상관은 없을 거야. 어차피 앞으로 한동안은 필요하지도 않을 테니까.”
그는 갑자기 기운이 쭉 빠졌다. 마치 과거의 자신이, 즉 문명인이었던 자신이 갑자기 이 모든 사태에 관해 설명을 요구하고 나선 듯한 기분이었다. 삶이 일정 수준 밑으로 확 가라앉아버린 상황에서, 과연 이런 삶은 계속해서 이어나갈 가치가 있을까? 한때 그들은 거의 4천 년 가까운 계보를 가진 도덕의 세계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불과 하루 만에 이 모두를 벗어던지고 만 격이었다.
그렇다면 여전히 그걸 고수하는 사람들이, 즉 주위에서 대혼란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여전히 사랑의 문법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할까?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설령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결국 죽고 말 것이고, 그 아이들도 함께 죽고 말 것이다. 오래전 그들의 선조들이 로마의 투기장에서 죽고 말았던 것처럼 말이다. 순간 그는 자기도 그렇게 죽을 수 있을 만큼의 신앙이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이어 자기가 지도자로서 이끌 고 있는, 그리고 지금은 저기서 잠든 작은 집단을 내려다보자, 이제는 그들의 삶이야말로 그들의 죽음보다 자기에게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