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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89356613
· 쪽수 : 84쪽
· 출판일 : 2021-10-31
책 소개
목차
우리가 세계에 기입될 때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여자는 고개를 숙이고 모퉁이를 돌았다. 그곳에 심연이 있었다. 노인은 지팡이를 내리고 무어라 중얼거렸다. 노인이 가는 방향으로 열다섯 발짝쯤 떨어진 곳에도 심연이 있었다. 그러나 아직 그들이 사라져서는 안 되었다. 그들은 저마다 금속의 온기와 처벌에 대한 수긍, 순간적인 역정과 튼튼한 지팡이에 의지해 심연을 통과했다.
경비원은 조그만 휴대폰 화면을 열심히 들여다보며 잠복 28일째를 맞이한 카메라맨의 마음을 공유했다. 화면 속 풍경은 여름과 겨울을 번갈아 지나고 있었다. 푸르거나 희거나. 무성한 녹색 이파리들 사이로 해가 비쳤다. 경비원은 맑고 청명한 시베리아의 여름에 몸을 숨긴 카메라맨과 그의 긴팔 셔츠를 보았다. 온통 눈이 내린 흰 풍경 속에서는 무엇도 그림자 지지 않았다. 사방이 더 흴 수 없을 정도로 흴 때, 카메라맨은 어디에 자신의 속된 신체를 숨기는가? 카메라맨이 화면에 등장할 때, 그를 찍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노란색으로 칠해진 벽에 장식 접시들이 걸려 있었다. 농부들과 소들. 그는 파란색 하나로 그려진 접시 그림들을 바라보며 면을 끊고 고기를 씹고 국물을 마셨다. 그러고는 애매한 얼굴로 미소 짓는 서버에게 값을 치르고 밖으로 나오며 한 여자를 스친 뒤 휴대폰으로 다시 한번 고수에 해당하는 베트남어를 검색했고, 다시 한번 rau m?i라는 단어들을 발견했으며, 자신이 통사를 미처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그가 식당 맞은편 골목으로 통사 없이 사라지면, 우리는 그와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와 대부분의 행인들 사이에서 날마다 일어나는 일이지만, 우리는 아마도 슬픔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는 라우 므이, 라우 므이…라고 중얼거리며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고, 그의 존재는 잃어버린 장갑 한 짝들의 세계와 이웃한 심연 속으로 영원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