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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인문 비평
· ISBN : 9791189898182
· 쪽수 : 430쪽
· 출판일 : 2020-01-20
책 소개
목차
책머리에 5
제1부
문학은 무엇이었는가를 다시 묻는 일 15
죽었는데, 우리는 왜 말을 합니까
―시적 애도는 어떻게 가능한가 25
애도, 재현불가능성, 문학의 공간 43
비평의 자리 57
한국문학, 변화의 문턱과 징후들 71
미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 87
미학주의를 위한 변명 95
예술로서의 삶 105
혁명의 예술, 예술의 혁명 117
제2부
텍스트를 앓는 시간 131
감정의 옆, 또는 뒤에서
―젊은 시인들의 첫 시집을 읽는 한 가지 방식 137
네 개의 목소리에 대한 단상들
―이다희, 한연희, 정다연, 이설빈의 시 157
분노의 시대, 분노하지 않는 시 179
알레고리적 해석의 시종 195
증발하는 세계와 폐쇄되는 세계
―‘정동’이라는 문제에 대하여 211
시와 헤테로토피아 225
서정의 고고학 233
제3부
이상한 나라의 탈옥수들
―함기석 시세계의 문학적 공리들 253
바깥의 시
―홍일표, <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 269
둘이면서 하나, 하나이면서 둘
―유강희, <고백이 참 희망적이네> 287
세상이라는 이름의 그림자극
―이해존, <당신에게 건넨 말이 소문이 되어 돌아왔다> 303
최승자적인 것
―생존 증명으로서의 시 쓰기 321
불혹, 비상구가 없는 생의 시간
―하린, <서민생존헌장> 337
검은색에 대한 사유
―2000년 이후의 송재학 시 읽기 353
나비, 그 아름다운 비문
―박지웅, <빈 손가락에 나비가 앉았다> 363
무한한 변이들
―김언의 시세계와 ‘언어’ 381
[보유] ‘주체’의 불가능성에 대하여
―김언의 시세계 391
토비아의 시대는 어디로 갔는가
―이재연, <쓸쓸함이 아직도 신비로웠다> 399
삼킬 수 없는 것들
―<야생사과> 이후 나희덕의 시세계 415
저자소개
책속에서
문학이란 무엇이었는가. 이 질문은 이중적 진술이다. 여기에는 상반되는 두 가지 느낌이 동시에 함축되어 있다. 이 문장을 과거에 대한 현재의 우위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때, 그것은 과거와 현재의 단절에 대한 긍정이거나 과거에 대한 회고적 태도로 간주된다. 반면 현재에 대한 과거의 우위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때, 이 문장은 과거와 현재의 단절을 부정적으로 판단하거나 현재의 문학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하지만 ‘문학’은 결코 대문자로 존재하지 않으며, ‘문학’은 불변의 자기동일성을 소유하고 있지도 않다. 나는 문학이 자기동일성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즉 어떤 것도 본질적인 차원에서 ‘문학임’을 규정할 있는 근거일 수 없기 때문에, 잠재적으로 모든 것은 문학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문학의 민주주의이다. 엉뚱한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문학의 민주주의는 정치적인 민주주의에 대해 이야기하는 문학이 아니라 형식, 내용, 표현의 층위에서 모든 것들이 ‘문학임’을 주장할 수 있는 그 열린 가능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더불어 ‘문학’은 어디까지나 역사적 산물이다. 모든 시대는 ‘문학’을 규정하는 고유의 방법을 갖고 있었으며, 거기에는 항상 ‘영향에의 불안’에서 벗어나려는 탈주선도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모든 시대를 관통하는 ‘문학’에 대한 불변의 법칙을 알지 못한다. 개인적인 취향이나 잣대에 따라 훌륭한, 좋은, 위대한 등의 수식을 붙일 수는 있지만, 불행하게도 우리에게는 ‘문학’과 ‘문학 아닌 것’을 판별할 수 있는 프로쿠루테스의 침대가 없다. 우리가 ‘문학’에 관해 합의할 수 있는 것은 고작 그것이 ‘언어’ 예술이라는 게 전부이다.
지난 90년대 후반부터 ‘문학’을 둘러싼 환경은 변화의 질주를 거듭해왔다. 문화에 대한 자본의 지배, 즉 ‘문화산업’의 출현과 인터넷을 포함한 미디어와 매체의 변화가 이것을 추동했다. 그 결과 문학출판에서 규모의 경제가 시작되었고, 출판상업주의가 심화되었으며, 문학의 생산-유통(광고)-소비 방식 전반에 커다란 변화가 초래되었다. 앞의 두 가지는 한국 문단에서 ‘문학외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논의되지 않고, 마지막 한 가지는 우리에게 아직 그것을 조망할 능력이 없는 듯하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변화가 상대적으로 ‘창작’에 더 커다란 흔적을 남기고 있다는 것인데, 이는 시장과 직접적으로 대면해야 하는 창작과 달리 ‘비평’은 학계 또는 대학이라는 또 다른 진지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비평이 존재감을 상실하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도 탈脫제도적이어야 할 비평이 ‘대학’이라는 제도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 비평적 욕망의 벡터가 ‘대학에서 평단으로’가 아니라 ‘평단에서 대학으로’의 방향이어서 비평(가)의 종착지가 ‘대학’이라는 안정적인 직장으로 귀결되는 현실에서 찾을 수 있다. 대학은 많은 비평가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제공하지만, 바로 그 방식을 통해 ‘비평’을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 거대한 변화의 가운데에서 ‘창작’이 시장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입증하려고 분투한 반면, ‘비평’은 전면적으로 ‘대학’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는 것, 이 현상의 원인을 어디에서 찾든 그것이 비평의 ‘쇠락’에 대한 증거임은 분명하다.
예술과 윤리는 대립하지 않는다. 현대문학에서 ‘윤리’가 강조되는 것은 타인과 세계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요청하는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문학이 도덕적으로 권장되거나 정당화될 수 있는 내용을 담으라는 요청과도 무관하다. 20세기 이후의 문학은 지속적으로 ‘타자적인 것’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타자적인 것’은 한 개인의 내면에 은폐되어 있는 ‘무의식’에서부터 국민국가시스템이 생산한 비국민에 이르기까지, 가부장적 사회의 타자인 ‘여성’에서부터 신자유주의적 상황에서 등장한 ‘이방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변주되면서 현대문학의 중요한 사유 대상이 되었다. 현대문학은 반복적으로 소설의 주인공은 물론 그것을 읽는 독자 모두를 ‘타자’와 마주하는 윤리적 상황으로 이끌어간다. 이 상황은 작가와 독자 모두에게 새로운 응답과 책임을 발명할 것을 요청한다. ‘윤리’란 정확히 말하면 이 새로운 응답과 책임의 발명이 요청되는 상황에 부여된 이름이다. 그러므로 모든 ‘윤리’는 타자에 대한 윤리일 수밖에 없다. 이때 ‘응답’이나 ‘책임’이라는 말을 기존에 존재하는 기성의 것, 나아가 법률적인 의미의 책임으로 해석해선 안 된다. 그것들은 현대의 정치학·철학적 사유의 요구를 회피한다는 점에서 차라리 무책임에 가깝다. 보장된 윤리는 윤리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리’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의 상당수는 그것을 이항적인 선택의 문제로 환원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즉 근대 이후 예술과 윤리는 별개의 영역이어서 예술을 윤리로 판단할 수 없으며, 궁극적으로 윤리와 분리된 예술만이 진정한 예술이라는 것, 따라서 근대 이후의 예술이 추구해야 할 것은 윤리가 아니라 미학적 가치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러한 이해구조 속에서 ‘윤리’에 대한 모든 강조는 전근대적인 권선징악의 잔재로 이해되어 부정적 대상으로 분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