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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사회과학 > 교육학 > 교육 일반
· ISBN : 9791190151030
· 쪽수 : 320쪽
· 출판일 : 2019-08-25
목차
서문: 진행형의 내러티브 13
I, 가능성의 창출 21
01 맥락의 탐색 23
02 상상력, 타파,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것들 35
03 상상력, 공동체, 그리고 학교 57
04 교육학의 발견 75
05 사회적 비전과 삶의 춤사위 99
06 어린 시절에 대한 회고 117
II, 조망과 현시 139
07 교육과정에 대한 지속적인 촉구 141
08 학습을 위한 글쓰기 165
09 가능성을 위한 가르침 171
10 예술과 상상력 193
11 텍스트와 여백 211
III, 진행형으로서의 공동체 241
12 다원주의로 향한 열정들 243
13 표준화, 공통의 배움, 그리고 다양성 265
14 다양한 목소리와 다양한 실제 289
참고문헌 및 수록 인용문 출처 309
책속에서
서문: 진행형의 내러티브
흔히 말해, "인간 개개인은 탐구(quest)라는 내러티브 형식을 통해 선(the good)에 대한 여러 아이디어와 그 관련성을 결정하면서 우리 자신의 삶을 절실히 이해한다"(Taylor, 1989, p. 52). 이는 나에게도 마찬가지인데, 시간의 단절성과 상대성을 염두에 두면서 우리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그러한 선의 개념에 접근해야 한다. 이 책, 『상상의 나래 펴기』에 수록된 에세이는 진행형(in-the-making)으로서의 내러티브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만약 우리의 학생들과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 탐구하지 않는 마음이라면, 우리는 교사라기보다는 단순 사무직 직원이나 기능공으로 여겨질 것이다. 교사인 우리는 현상 유지만을 위한 교육에 만족하지 못한다. 이제 내 삶의 한 가운데에서 탐구, 다시 말해 키에르케고르가 "삶의 방식"(1940)이라고 언급했던 그 형태로 나 자신의 에세이들을 살펴본다. 이 탐구는 여성, 교사, 어머니, 모범적인 시민, 뉴요커, 예술애호가, 활동가, 철학자, 백인 중산층 미국인이라는 나의 정체성을 포괄한다. 나 자신이나 나의 내러티브는 결국 어떠한 단 하나의 형태로는 표현할 수 없다. 나는 수많은 사회 문화적인 영향을 피할 수 없는 교차점에 서 있고, 언제나 그리고 영원히 그 길에 서 있다. 인간적이고 고상하고 정의롭다는 의미를 일관적으로 품고 있더라도, 나 자신의 정체성을 여러 각도에서 인지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이러한 다양성 안에서 내 삶의 프로젝트는 교수, 학습, 그리고 교육의 여러 모델에 대한 이해로 귀결된다. 나는 이러한 프로젝트를 통해 나 자신을 창조하고 유지해 왔으며, 이러한 형태를 통해 세상으로 향한다. 노력을 통해 그 프로젝트를 아주 핵심적으로 추진해 왔는데, 이것이 이 책 『상상의 나래 펴기』가 태어나게 된 배경이다.
나는 교사교육을 가장 염두에 둔다. 이 관심의 중심에는 인문학과 사회활동에 대한 나의 열정이 깃들어 있다. 1960년대 미국의 시민운동에 깃든 가치와 비전, 그리고 그 시대의 평화운동이 나의 탐구에 면면히 흐르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혁명가들의 영웅적인 모습들을 모두 언급하지는 못하더라도, 프랑스 시인인 르네 차르(Rene Char)의 관점을 주목하고자 한다. 혁명가였던 그는 "자신의 삶, 삶 그 자체밖에 없는 슬프고도 불투명한 자신으로 돌아왔을 때, 소중한 보물을 잃게 되었다"(Arendt, 1961, p. 4)고 했다. 당연하지만 차르의 상실감은 전쟁이나 폭력의 정지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행동하고, 도전하고, 새로운 시도를 추구했던 그 시간들의 상실과 더 이상 그렇지 않은 현실을 인식하면서 비롯되었다. 유사하게도, 우리의 세계가 시대를 거쳐 변화하고 더욱 복잡해져도, 미국의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 많은 사람들이 간직해 왔던 정신이야말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값진 보석이라 믿는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교육학 분야에서도 사람들은 매 순간 현재 공교육을 훼손하는 배려 없음, 진부함(banality), 기술적 합리성에 대한 지지, 부주의함, 그리고 "야비한 불평등(savage inequalities)"(Kozol, 1991)에 저항하기를 선택한다고 확신한다.
이 책 『상상의 나래 펴기』에서 내가 삶에서 탐구해 온 바를 다른 교사와 교사 교육자의 노고와 연결해 보고자 한다. 그들은 단순 사무직이나 기술자로 취급 받으며 지쳐 있고, 차르의 표현처럼 삶의 그 자체에서 슬프고 불투명한 개인으로서의 피곤함을 호소한다. 소망컨대 독자들이 이 책을 읽는 동안 일종의 침묵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상황에 관심을 기울이고, 동시에 타인의 삶의 모습에 동참하면서 무슨 말을 나누고 싶어지는지 발견했으면 좋겠다. 이를 통해 의식적으로 다양한 배경과 관점을 알고 싶어지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 집중적으로 이질감과 동질감을 표현하고자 한다. 인정하건대, 우리 앞에 펼쳐진 대상은 마치 "뒤범벅 박물관"(Smithson, 1979, p. 67)과 같다. 그렇다고 해서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이 "브리콜라지"(bricolage)나 콜라지라는 개념을 통해, 오래된 신화, 반대급부, 그리고 위계질서에 대한 전복이야말로 현 시대에 적합한 의사소통법이라는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도 않는다(Schrift, 1990, p. 110). 그리고 교사들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세상을 구성하는 화법을 찾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일단 내 생각과 소망에 무작정 동의하라고 강요하거나 독자들도 나와 유사한 사고 방식으로 대상을 구성하라고 제안하지 않는다. 나의 당면 과제는 독자의 상상력을 일깨워서, 우리 모두가 "환영의 소음…의미에 대해 동떨어진 교차점, 역사에 대한 낯선 이해의 장, 예측불허의 메아리, 낯선 유머"(Smithson, 1979, p.67)를 초월하여, 우리를 공동체로 이끄는 의미 있고 이해 가능한 그러한 소통의 장으로 함께 도달하기 위한 노력이다. 우리가 그러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교육의 의미를 결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과거에는 교육을 단순한 지식전달, 의사소통, 새로운 시도, 젊은이에게 "공통의 세계를 새롭게 하는 업무"(Ahrent, 1961, p. 196) 등에 대한 준비과정으로 간주하였다. 이제는 공통의 세상이 어떠한 모습이어야 할지 상상하면서, 새롭고 다양한 아이디어를 통해 전통적인 내러티브 방식을 거부하거나 탈피하고자 한다. 주요한 교육의 결과물 그리고 교육 목표에 대한 공식적인 정의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무엇이 가치 있고 유용하며, 무엇을 꼭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한 전적인 동의가 부재한다.
상상력이야말로 무엇보다 공감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이다. 이는 내가 상상력에 주의를 기울이는 여러 이유 중 하나이다. 상상력은 일관성 있는 세상을 만들어낸다. 상상력이야말로 우리 자신과 교사들이 오랜 시간 동안 "타인"이라고 불러 온 사람들과의 벌어진 공간을 넘나들게 한다. 타인들이 그들의 단서를 기꺼이 제공한다면, 우리는 그를 통해 이방인이 되어 새로운 눈과 또 다른 귀로 세상을 다시 보게 된다. 상상력은 대안을 현실로 가능하게 하는 능력이다. 상상력은 당연시 여겨온 대상을 부수고, 익숙한 구별과 굳어진 개념 정의를 한쪽으로 밀어 놓는다.
역사적으로 사람들은 어린 아이들이 그들 스스로 유의미한 세계를 구성할 능력이 없거나 전혀 의미를 만들지 못한다고 믿어왔다. 말하기 능력도 그처럼 간주했다. 기껏해야 아동을 미완의 성인으로 간주하여, 어린이들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를 향해 돌진한다고 여겨왔다. 오늘날 우리는 어린이들이 창작한 시와 일기들을 읽는다.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실제로 우리는 이성적인 힘이 아닌 상상력을 통해 이들의 실제를 엿본다. 이와 유사하게, 그렇지만 부끄럽게도 서구사회에서 백인들은 우리가 "흑인" 혹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평범한 지능이나 문해능력이 없다고 폄하해왔다(Gates, 1992, pp. 52-62). 이와 더불어 남성중심의 사고에서 여성 또한 부드럽고 상대적으로 유치하고,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제대로 사고할 수 없다고 여겨졌다. 우리 시대의 발전이란 이유 불문하고 타인으로 분류해 온 이들(인종, 성별, 종교, 교육수준, 문화, 윤리관, 지리적 위치, 신체조건)을 가치 있는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한 점이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는 모두 죽게 마련이고, 죽음에 대한 인식은 한 개인이 살아가면서 그 사람에게 벌어진 일에 관한 이야기를 만든다. 결국 우리 인간은 상상력을 발휘하여 세상과 마주하고, 상상력을 통해 보다 수월하게 우리 앞에 펼쳐진 세상을 바라보고 느끼는 존재이다. 타인의 경험이나 입장을 승인하거나 더 나아가 이를 이해하라는 의미나 강요는 아니다. 다만 인간의 능력으로서 타인을 충분히 이해하도록 우리의 경험을 넓혀나가자는 의미이다.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상상력을 시적으로 승화하는 능력, 작가, 화가, 조각가, 영화제작자, 안무가, 그리고 작곡가들이 "마치 ~인 것 같은" 상상력으로 무언가를 창출하는 능력, 그리고 과거와 미래의 시대를 넘나들며 예술가가 세상에 참여하는 것으로 타인의 삶에 대한 이해의 폭이 달라지기도 한다. 시적 상상력을 통해 우리는 조지 엘리엇의 『미들마치(Middlemarch)』 라는 소설에 등장하는 영국 중부 지방의 사회적 구조와 여기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목격하고, 남부의 시골부터 토니 모리슨의 소설 『재즈(Jazz)』에 등장하는 뉴욕 할렘의 조명과 소리를 느끼면서 여행하며, 마르타 그라함의 〈아팔라치안의 봄(Appalachian Spring)〉의 안무를 통해 미국 개척자의 결혼을 경험한다. 그리고 생동감 넘치는 프라다 칼로(Frida Kahlo)의 상처 가득한 자화상의 모습과 무리요(Murillo)의 깊이 사색하는 젊은 성모마리아의 모습이 겹쳐지고, 베르디의 〈레퀴엠〉이 전하는 치솟는 듯한 선율의 구조를 통해 더욱 나 자신이 확장됨을 느낀다. 예술은 문화적 다양성, 공동체의 형성, 세상에 대한 '널리-깨어있음'으로(wide-awake) 연결되는데, 이러한 탐색의 과정에서 체험하는 예술과의 만남에 대해 더 언급하고자 한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예술은 삶의 세상을 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잘 인지된 예술과의 만남에서 우리는 일상적이고 친숙한 부분들이 놀라우리만치 전혀 친숙하지 않은 경지로 넘나드는 체험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습관적으로 인간의 가능성, 젠더의 차이, 생태학, 소위 "민족 정체성" 혹은 핵심 교육과정을 당연하게 여기곤 했다. 그러나 종종 연극 작품 하나, 미술 작품 하나, 목관 5중주 작품 하나가 내가 이전까지 당연하다고 간주한 관점들을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이끌어낸다. 그리고 종종 예술작품을 경험과 인식의 경계, 다시 말해 나의 경험의 영역 밖에 존재하는 장소에서 그 작품과 마주할 때 새 인식과 새 활력으로 빠져든다. 발견에서 또 다른 발견으로 이동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새롭게 재편되는 내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며, 내 삶에 있어서 새롭게 태어나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사회적인 상상력이 있다. 이는 우리 사회의 결핍, 우리가 살고 있는 거리와 학교에서 무엇이 바람직하고 무엇이 가능한지 그 비전을 창출하는 능력이다. 사회적 상상력을 기술하면서 사르트르가 제시한 명제를 생각해 본다. 즉, "우리의 어려움과 고통을 새로운 관점으로 마주하고, 더 이상 이러한 문제들을 참을 수 없다고 결정하는 날이 사회 문제를 다른 수준으로 받아들이는 날이다"(1956, pp. 434-435). 즉, 지금보다 더 나은 상황이 존재하고, 사회 문제에 대한 대안적인 요소가 있다고 생각할 때 비로소 냉혹한 상황을 인정한 것이라는 말이다. 이와 유사하게 관료적이고 무관심이 팽배한 학교의 문제점을 인지하는 방법을 배우고자 하는 학습자의 노력을 인정하고 이를 유지하는 중에만 인간미 넘치고 자유로운 교실을 비로소 만들어낼 수 있다. 결국 우리가 변하고 다시 태어나기로 결심할 때 이러한 결과가 가능하다.
이러한 나의 묘사는 일종의 유토피아적인 사고이다. 이는 수동적으로 규칙을 따르기를 거부하는 사고, 남이 가지 않은 길을 바라보며 새롭게 사회 질서를 수행하려는 사고, 좀 더 활기찬 방식으로 세상에 존재하려는 사고이다. 이러한 변형의 상상력은 여러 종류의 대화를 통해 펼쳐질 수 있다. 여기서 대화란 서로 다른 문화와 다른 삶의 모습에서 온 젊은이들 간의 대화이며, 그들에게 당면과제로 맡겨진 가치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 함께 모인 이들 간의 대화이다. 또한 이는 공동 과제를 맡은 이들 간의 대화이며, 불의에 저항하고, 중독이나 질병을 피하고 극복하려는 이들 간의 대화이다. 그러한 대화가 교실에서 활성화될 때, 아주 어린 학생부터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시작하려는 동기가 부여될 것이다. 샘솟아나는 그 무언가의 이미지가 냉대와 무관심을 대치할 것이다.
진행형으로서의 내러티브가 점점 그 모양새를 갖추고 다양해지는 동안, 학교에서 현재 논의 중이고 개혁의 과정에 있는 능동적 학습(active learning)에 대한 염려가 더 뚜렷해질 것이다. 나는 학교 교육을 교육이라는 더 큰 영역으로 확장시켜 사고하도록 조력하고 싶다. 교육이란 모든 가능성에 대해 활짝 열려 있고 또 열려 있어야만 한다. 이러한 사고를 더 활발하게 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삶에 다가가려고 노력한다. 이런 노력들은 내가 특히 좋아하는 버지니아 울프의 이야기에 빗대 보면 바로 "실타래 같은 일상"의 굴레에서 벗어난 "존재의 순간들"(1976, p. 72), 인지의 순간들, 심화된 인식의 순간들이다. 노토자케 세인지(Ntozake Shange)의 무용시에 등장하는 〈갈색 옷의 여인(Lady in Brown)〉을 통해 깨어나는 순간들이며, 도서관의 아동도서 열람실에서 (규칙을 어기고) 성인도서 열람실로 이동하여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그녀의 삶에서 "현실 파악의 시초(the beginn uv reality)"가 되는 것과 같은 어린 시절의 추억과 비전을 정리해 보는 순간이기도 하다(1977, p. 26).
나는 일상 속에 정해진 행동의 기계적인 사슬에서 벗어나 새로운 순간들로 이동하려는 반복적인 메시지들을 제시해 왔는데, 이는 바로 카뮈가 저술하였듯이 "'왜' 라는 질문이 샘솟고 모든 것이 태동하는 시점이다. 이는 그 권태로움이 놀라움으로 물들기 때문이다. '시작', 이것이 중요하다. 기계적인 삶의 거의 마지막 장면에서 권태로움이 생겨나지만, 이는 동시에 의식이 일어나도록 이끈다"(1955, pp. 12-13). 모든 것은 탈출, 뛰어 오름, 그리고 질문에 의존한다. 이것이야말로 학습이 이루어지는 방법이며, 교육적 과제는 젊은이들이 질문을 시작하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그 목소리와 톤에는 "왜"가 담겨진 상황을 만드는 일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진행형으로서의 내러티브는 학교 개혁과 관련한 해명에서부터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문해능력의 형성과정을 제기하기까지 인간으로서 궁금증을 해결해 가는 진행과정들과 경험의 빈 공간에 대한 응답들, 그리고 무의미함에 대한 저항을 조사하고 또 조사한다. 나의 관심사는 발현적 교육과정, 윤리적인 삶, 그리고 공공영역에서의 정의로움과 같은 주제까지 두루 걸쳐 있는데, 이렇게 다양한 주제를 다각적으로 논의할 때 내가 제안하는 상상의 나래 펴기가 가능하다. 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서로가 서로에게 새롭고 이방인이기 때문에, 소위 다문화주의에서는 다원주의와 이질성을 강조한다. 이를 위해 나는 예술과 진행형으로서의 공동체, 다시 말해 민주주의로서의 공동체를 연결하기로 선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