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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서양철학 > 미학/예술철학
· ISBN : 9791190413008
· 쪽수 : 404쪽
책 소개
목차
들어가는 말
1 ‘그의 손으로’_ 미켈란젤로 혼자 다 그렸다고?
르네상스의 공방 | ‘기술’은 ‘예술’이 되고 | 친작의 신화
2 렘브란트의 자화상_ 이것은 자화상인가, 자화상이 아닌가
렘브란트의 서명 | 자화상은 자화상이 아니다 | 렘브란트의 자기숭배?
3 루벤스의 스튜디오_ 17세기의 어셈블리라인 회화
누구의 그림인가 | 17세기 감정의 패러독스?
4 푸생은 세 사람인가_ 〈판의 승리〉, 〈바쿠스의 승리〉, 〈실레누스의 승리〉
푸생이냐 루벤스냐 | 푸생의 스튜디오 | 〈판의 승리〉와 〈바쿠스의 승리〉, 둘 중 어느 것이 친작인가 | 〈실레누스의 승리〉
5 들라크루아의 조수들_ 낭만주의와 19세기 친작 열풍
낭만주의 혁명 | 〈럼리의 친필〉 | 들라크루아의 조수들
6 신화가 된 화가, 반 고흐_ 화가의 전형이 아닌 ‘예외적 존재’
쿠르베의 작업실 | 마네 이후의 인상주의자들 | 고흐의 신화
7 아우라의 파괴_ 20세기 미술사에 일어난 일
신의 자리를 차지한 예술 | 모더니즘의 반反미학 | 후기모더니즘 | 팝아트와 포스트모던 | 포스트모던의 조건
8 예술의 속물적 개념_ 낭만주의 미신에 사로잡힌 21세기의 대한민국 미술계
증발한 20세기 | 예술의 신성가족 | 신분에서 기능으로
9 조영남 사건에 관하여_ 현대미술의 ‘규칙’과 대중·언론·권력의 세 가지 ‘오류’
조영남은 사기꾼인가? | 저작권법 위반인가? | 이른바 ‘사기죄’에 관하여 | 범죄(?)의 재구성 | 검찰이 저지른 범주 오류 | 유시민도 모르는 ‘조영남 사건’의 본질 | 데이미언 허스트 vs 데이비드 호크니 | 물리적 개입이 있어야 예술인가? | 조영남만은 안 된다? | 관행을 깨야 하나, 따라야 하나? | 세 가지 오류
10 조영남 작가에게 권고함_ 내가 이 사안에 끼어든 세 가지 이유
조수가 창작자다? | 피블로프의 개 | 작가와 조수의 관계 | 슈뢰딩거의 대작 | 발상과 실행의 분리 | 원작에서 복제로, 거기서 합성으로 | 개입해야 할 세 가지 이유 | 조영남에게 보내는 권고 | 예술의 고유한 관습
11 조영남은 개념미술가인가_ 미술평론가 임근준 등의 주장에 대한 반론
피상적인, 너무나 피상적인 | 백 투 더 프리모던 | 화수추방론
12 두 유형의 저자_ 저들이 개념미술의 개념을 ‘퇴행’시킨 이유
작품의 저자는 누구인가 | 작가의 손 | 저자의 두 유형
13 워홀의 신화_ 환상 속 워홀과 현실 속 워홀
핸드메이드-레디메이드 | 워홀의 신화 | 워홀의 시대는 끝났다? | 상품화 · 상사화 · 금융화 | 아우라와 탈아우라
14 예술의 신탁통치, 주리스토크라시_ 현대미술의 규칙을 검찰이 제정하려 드는 게 옳은가
주리스토크라시 | 빌라도와 대제사장 | 카프카의 재판 | 저작권법 위반 | 어떤 포스트모던
주
책 속에서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오늘날 ‘예술’이라 하면 흔히 한 개인의 고독한 ‘창작’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 시절 예술의 생산은 성격상 여러 기술자들 사이의 협업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공방에는 제작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오랜 시간에 걸쳐 확립된 조직체계와 작업절차가 존재했다. 이 작업자 집단의 꼭대기에 장인이 있었고 그 아래로 조수나 제자가 고용되어 있었다. 물론 그 장인도 한때는 다른 장인의 조수 혹은 제자였을 것이다. 다빈치 같은 거장도 어린 시절에는 명장 베로키오의 공방에서 조수로 일했다.
중세와 르네상스에는 이렇게 진품성authenticity의 개념이 친작성autographness과 일치하지 않았다. 위의 인용문이 말해주듯이 당시에 ‘제작된’fatto이라는 말은 ‘스스로 만들다’fare 외에 ‘만들게 시키다’far fare라는 뜻도 갖고 있었다. 즉 장인이 조수에게 만들도록 시킨 작품도 “그[장인]의 손으로 제작된” 작품으로 간주됐다는 얘기다. 다시 말해 작품이 일정한 품질을 갖추고 해당 장인의 양식을 반영하기만 한다면 누구의 손을 거쳤든 당시에는 장인의 진품으로 간주했다. 오늘날 우리도 물건을 살 때 브랜드는 따져도 그것을 실제로 만든 이들의 이름은 굳이 묻지 않는다. 그와 마찬가지 이치다.
친작의 관습은 이처럼 비교적 최근에 확립된 것이다. 그 관습이 관행으로 굳어지자 과거에도 당연히 그랬으리라 착각들을 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바사리와 같은 르네상스 저자들의 글을 읽으면 마치 그 시절에 이미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근대적 예술문화가 ‘완성태’로 존재한 듯 느껴진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그들의 저작이 보여주는 것은 르네상스의 ‘이상’일 뿐 그 시대의 ‘현실’이 아니라는 점이다. 시스티나 성당에서 홀로 비계에 누워 그 모든 그림을 손수 그렸다는 미켈란젤로의 전설. 이 신화와 현실 사이에는 상상력만으로는 메꿀 수 없는 넓은 간극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간극이 가끔은 당혹스러운 상황을 만들어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