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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90526920
· 쪽수 : 236쪽
· 출판일 : 2022-10-04
책 소개
목차
작가의 말
잔치국수
분천
어린 농부
<잔치국수·분천·어린 농부>를 읽고 / 강진철
저자소개
책속에서
분자 씨는 빨강색이 잘 어울린다고 말하는 영감의 말을 알아듣는다. 영감의 얼굴에서 보인 야릇한 웃음도 놓치지 않는다. 분자 씨는 당케 하고 활짝 웃으며 고맙다고 대답한다. 사람들이 분자 씨를 보는 시선은 언제나 저랬다. 사십여 년을 수술실에 근무하며 살아남은 것은 분자 씨의 깔끔한 성격이 한몫을 했다. 수술 도구를 분자 씨보다 더 깔끔하게 삶아 말려놓는 사람은 없었다. 자기 것뿐 아니라 남의 것의 뒤처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글씨를 모르니 눈치로 배우고, 외워서 하고, 주문이나 기록할 것이 있으면 젊은 간호사에게 커피 타다 주고 궂은일을 대신해 주며 부탁했다. 그럴 때마다 저 영감 같은 야릇한 표정을 분자 씨에게 보내곤 했다. (「잔치국수」 중에서)
고집만 남은 두 여자가 아파트가 떠나갈 듯이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싸우다가 화를 견디지 못하고 분자 씨가 가방을 챙겨든다. 시작은 측은지심으로 시작하지만 매번 싸움으로 끝난다. 씩씩대며 현관을 향해 가던 분자 씨가 멈추며 말한다.
“어머나! 내 잔치국수.”
“잔치국수 해 먹고 가.”
애희가 현관으로 가 분자 씨의 팔을 붙잡는다. 분자 씨가 못이기는 체 돌아와 아직 분이 안 풀렸는지 가방을 식탁 위에 던진다.
“미안해.”
이럴 때는 매번 애희가 사과한다. 매주 세 번 꼬박꼬박 와 주는 고마운 분자 씨인데 비록 화투 방석을 뒤집어엎었다지만 참아야 했다. 분자 씨도 파토낸 것은 자기라 애희에게 미안해진다. 분자 씨는 미안하다는 말 대신에 자기가 사 온 비닐 백에서 잔치국수를 꺼낸다. 얇은 종이가 빼빼 마른 하얀 국수발의 몸을 감았다. 그걸 볼 때마다 분자 씨는 고국을 떠나올 때 배고프고 헐벗었던 고국의 모습처럼 느껴진다. 못 살던 시절 지겹도록 먹던 잔치국수가 이국땅에서 이렇게 그리울 줄이야. 애희가 매번 뒤뚱거리며 먹을 것을 해 놓았었는데 잔치국수 사 올 거라는 분자 씨의 말에 점심 준비를 하지 않았다. 분자 씨가 부엌에 들어가 물을 올리고 다시 팩을 넣고 국물을 우린다. (「잔치국수」 중에서)
잘 훈련된 말 같았던 신애가 오십이 되던 해에 반란을 일으켰다. 남편과 상의하지 않고 말을 샀다. 집에 마구간이 없으니 마장에 위탁했다. 마장에서는 아침에 말을 초원에 풀어놓고 풀을 먹이고 오후에는 마구간에 데려다 놓는다. 오후에는 주인이 말을 관리해야 한다. 말의 털을 빗어주고 마사지 해주고 산책 시키고 훈련시키는 것은 말 주인의 몫이다. 점심 손님들이 가고 나면 식당은 종업원들에게 맡기고 신애는 오후 내내 밖에서 말과 함께 살았다.
남편의 눈에서 불이 일어났다. 말에게 들어가는 비용을 가지고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공중에 만 마르크의 전화요금을 뿌려댈망정 말에게 들어가는 일체의 비용은 아까워하며 간섭을 했다. 저 새끼는 돈을 한없이 잡아먹어. 그 돈이 다 똥이 되어 나온단 말이야. 그 똥도 돈 주고 치워야 하잖아. 그런 걸 왜 키워. 당신 바보천치 아냐? 남편은 말을 돌보기 위한 신애의 오후 외출을 못견뎌했다. (「잔치국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