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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독일소설
· ISBN : 9791190818360
· 쪽수 : 256쪽
· 출판일 : 2025-04-25
책 소개
목차
1. 두 세계
2. 카인
3.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
4. 베아트리체
5.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 투쟁한다
6. 야곱의 싸움
7. 에바 부인
8. 종말의 시작
부록: 헤르만 헤세의 문학 세계를 기리며(토마스 만)
옮긴이 해설: 진정한 ‘나 자신’을 만나는 내면의 여정
헤르만 헤세 연보
리뷰
책속에서
작가들은 소설을 쓸 때면 자기들이 신이라도 된 듯하다. 자기들이 그 어떤 사람의 인생 이야기라도 낱낱이 꿰뚫어 보고 헤아릴 수 있다는 듯, 신이 사람의 인생 이야기를 자기들에게 직접 들려주기라도 하는 듯 언제 어디서나 전혀 거리끼지 않고 거침없이 써 내려간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사실 작가들도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그리고 작가들이 자기 이야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내게는 내 인생 이야기가 중요하다. 이것은 내 이야기이고 ‘나’라는 한 인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상상해 낸 이야기가 아니며 있을 수도 있는 인간 이야기도 아니다. 어떤 이상적인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다. 여하튼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어떤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단 하나 존재하고 뚜렷이 살아 있는 ‘나’라는 인간의 이야기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별안간 크로머의 휘파람 소리가 들려온다면 나는 까무러칠 듯 놀랄 것이다. 그 시간 이후 잊을 만하면 그 애의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고, 어디를 가든 끊임없이 그 소리가 귓속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어느 곳에 있든, 어떤 놀이를 하든,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든 이 휘파람 소리가 번번이 쫓아왔다. 휘파람 소리는 나를 옴짝달싹못하게 묶어놓더니 이제는 내 운명이 되고 말았다. 나뭇잎이 울긋불긋 물드는 다사로운 가을날 오후에 나는 내가 아끼는 우리 집 작은 화원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나는 옛 시절 아이들 놀이를 다시 즐기고 싶은 야릇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 시절의 데미안에 대해 내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가만가만 기억을 돌이켜본다. 일 년이 지나가도록 나는 그 애와 한 번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의식적으로 그 애를 피했고, 그 애는 결코 나를 밀어붙이듯 무리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어느 날 우연히 마주치는 순간에도 그 애는 내게 고개를 끄떡이며 가볍게 인사만 했다. 그럴 때면 데미안의 친절함에 조롱이나 삐딱하게 빈정거리는 듯한 비난의 섬세한 울림이 스며들어 있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스치기도 했다. 그러나 그건 내 상상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 애와 함께 겪었던 일, 당시에 그 애가 내게 미친 그 이상한 영향력은 그 애도 나도 모두 잊어버린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