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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명사에세이 > 기타 명사에세이
· ISBN : 9791191119084
· 쪽수 : 544쪽
· 출판일 : 2020-09-25
책 소개
목차
작가의 말
1장 파이의 신비
2장 모퉁이를 돌 때마다
3장 38번의 탄성
4장 오늘도 평화로운 빨강 나라
5장 목이 말라서 준비한 것들
6장 따로 또 같이
7장 자주 오래 멈춰 서 있는 자
8장 없던 마법도 기어이
9장 함성과 탄식
10장 촛불을 끄기 전에
11장 크레셴도로 고조되는 음악처럼
12장 때로는 과감하게 또 때로는 수줍게
13장 걸어서 도착한 천국의 해변
14장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15장 마그넷에서 고양이 소품까지
16장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17장 불빛을 향한 이야기
photos by Lee Dongjin
파이아키아, 다시 꾸는 꿈_ 이동진×봉일범 대화의 기록
리뷰
책속에서
서울 성수동에 개인 작업실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이름을 붙일까 고민했다. 작업실 명칭에 내 이름을 넣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의 현재와 꿈이 함께 담긴 이름이길 원했다. 여러 단어를 이어 붙이느라 늘어지길 원하지 않았지만, 고색창연한 한자로 축약해 작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무미건조하게 짓고 싶진 않았다. 신화를 워낙 좋아하는지라 결국 신화 속 지명을 가져오기로 했다. 바로 파이아키아다. (중략)
오디세우스의 마지막 여행지인 파이아키아와 관련된 신화 속 이야기는 여러 측면에서 내 작업실과 겹쳐 보였다. 나 역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후 십수 년간 많은 일들을 겪었다. (오디세우스라는 이름은 어원적으로 ‘고통’을 의미하는 단어를 품고 있다.) 특히 이 작업실로 오기 직전 표류에 가까운 일들을 비교적 짧은 기간에 집중적으로 겪었다. (그건 누구의 분노와 관련되어 있었을까.) 이 작업실은 9층짜리 건물의 3층에 들어서 있지만, 사실상 외부와 격리되어 있다. (안에 있으면 외부와 거의 완전히 차단되어, 낮과 밤이 바뀌고 시간이 흐르는 것조차 좀처럼 느끼지 못한다.) 그리스 신화 속에서 파이아키아는 파라다이스 같은 곳으로 묘사되는데, 내게 이 작업실은 종종 그렇게 여겨진다. (물리적 조건이 아니라 심리적 환경이 그렇다.) 누군가 나를 숨어서 도와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내가 나 스스로를 대접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결정적 도움을 준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내가 최종적으로 머물 곳은 아니다. (알키누스와 나우시카는 오디세우스를 파이아키아에 붙잡아두고 싶어 했다.) 밤이 늦으면 이곳을 나서 집에 가야 하고, 세월이 흐르면 여기를 떠나 다른 곳에 정착해야 한다. (파이아키아는 내게도 마지막 여행지가 될까.)
하지만 나는 파이아키아에 머무르는 동안만큼은, 오디세우스가 알키누스와 나우시카에게 그러했듯, 그간 내가 직접 몸으로 부딪쳐 경험한 이야기들과 책과 영화와 음악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체험한 이야기들을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씩 차근차근 들려주고 싶다. 알키누스와 나우시카가 그랬듯, 사람들이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면 좋겠다.
- 1장 「파이의 신비」 중에서
파이아키아의 중심에 놓인 것이 뭐냐고 누가 묻는다면 나는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곳에는 실로 다양하고도 많은 물건들이 있지만 그 상징적인 중심에는 마치 한 그루 우주나무처럼, 또는 끝내 하늘에 닿지 못하는 바벨탑처럼, 타르코프스키의 「희생」 필름이 쌓아 올려져 있다. 아닌 게 아니라, 「희생」은 믿음으로 죽은 나무 한 그루를 살리는 영화였다.
러시아 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내게 영화의 첫사랑 같은 인물이다. 그 이전에도 물론 영화를 즐겨 보았지만 타르코프스키의 작품들을 접하면서 영화를 완전히 새롭게 보기 시작했다. 경이로운 세계의 발견이었다.
「희생」의 셀룰로이드 필름을 우크라이나에서 구했다. 동서양의 귀한 영화 필름들을 수십 년간 보관해온 수집가로부터였다. 필름의 양이 워낙 많고 무거워서 배송받는 데도 어려운 점이 많았는데, 전체 두 박스 중 절반을 담은 한 박스만 도착하고 감감무소식이어서 한동안 애를 태우기도 했다. 분명히 두 박스를 함께 보냈다는데, 구천을 떠돌다가 왔는지, 무려 한 달 뒤에야 나머지 한 박스가 도착했다. 잃어버릴 뻔했던 내 반쪽.
- 2장 「모퉁이를 돌 때마다」 중에서
박찬욱 감독을 뵐 때는 장도리를 준비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영화 「올드보이」의 가장 유명한 소품이니까. (「박쥐」를 대표할 수 있는 링거병과 「올드보이」의 장도리 사이에서 잠시 고민했지만, 링거병은 아무래도 모양이 많이 빠질 것 같아 포기했다.) 파이아키아 근처 철물점에 들러 장도리 하나를 샀다. 사인하기 좋도록 밝은색의 나무 손잡이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것으로 골랐다. 모래 값과 돌 값에 이어 장도리 값도 알게 됐다. 8,000원이었다.
박찬욱 감독은 이런 정도의 사인은 익숙하다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유장한 필체로 서명을 남겨주셨다. (링거병도 함께 가져올걸!) “이동진 선생께”라고 고색창연하게 적어주었다. (뭐, 대대손손 물려주어 고색창연해질 기념품이니까.) 사인한 장도리를 들고 장난스레 포즈까지 취해주셔서 (은근 포토제닉하시다) 웃음을 터뜨리며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극 중에서 「올드보이」의 주인공 오대수는 그 이름대로 오늘도 대충 수습한다지만, 수집가는 오래전부터 철저히 준비한다. (수집가가 주인공인 영화가 나온다면 그 이름을 오철준으로 해야 할 듯.)
- 5장 「목이 말라서 준비한 것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