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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중국사 > 중국사 일반
· ISBN : 9791192404318
· 쪽수 : 484쪽
· 출판일 : 2023-01-26
책 소개
목차
|들어가면서| _5
제1장 능(陵)의 기원
1. 능(陵)은 크고 높아야 한다 _17
2. 중국에서 능(陵)의 출현 _26
제2장 하(夏)·상(商)·주(周)의 왕릉
1. 삼황오제와 하(夏)나라–중국 역사의 여명기 _33
2. 상(商)나라 왕릉–신화에서 역사의 무대로 _36
3. 주(周)나라 왕릉–그리고 춘추전국시대로 _47
제3장 진(秦)·한(漢)·남북조(南北朝)의 황제릉
1. 진시황릉(秦始皇陵)–최초, 최고, 최대의 황제릉 _65
2. 한(漢)나라 황제릉–시안의 대 피라미드군(群) _93
3. 남북조(南北朝)의 황제릉 _130
1) 북조의 황제릉–이민족, 황제릉을 본받다 _132
2) 남조의 황제릉–혼란 속의 위대한 석각예술 _140
제4장 수(隋)·당(唐)·송(宋)의 황제릉
1. 수(隋)나라 황제릉–가장 인기 없는 황제릉 _163
2. 당(唐)나라 황제릉–산으로 올라간 황제릉 _172
3. 송(宋)나라 황제릉–북송(北宋)과 남송(南宋) _228
제5장 요(遼)·금(金)·원(元)의 황제릉
1. 요(遼)나라 황제릉–찾기도 어려운 황제릉 _275
2. 금(金)나라 황제릉–가장 처참한 황제릉 _297
3. 원(元)나라 황제릉–과연 황제릉이 있는가? _318
제6장 명(明)나라의 황제릉
1. 주원장(朱元璋)의 시조릉(始祖陵)–조상의 무덤에 황제릉을 세우다 _327
2. 명태조의 명효릉(明孝陵)–명황제릉의 시작 _339
3. 명십삼릉(明十三陵)–장대한 명황제릉군의 위용 _348
제7장 청(淸)나라의 황제릉
1. 후금과 성경삼릉(盛京三陵)–만주의 초기 청황제릉 _385
2. 청동릉(淸東陵)–중원에 세운 청황제릉 _410
4. 청서릉(淸西陵)–또 하나의 청 황제릉군 _444
|마치면서| _466
|參考文獻 | _469
|색인| _479
저자소개
책속에서
거대지향의 왕릉
한국 사람이라면 평생을 통하여 왕릉을 몇 번쯤은 가 보곤 한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부터 교수로서 학생들을 데리고 경주에 가서 보는 신라왕릉, 충남에 위치하고 있어 가끔씩 자문하러 가게 되는 공주나 부여에 위치한 백제왕릉 그리고 서울 사람은 누구나 한 번쯤 가봤을 조선왕릉이 주 대상이다. 특히 신라의 황남대총을 본 사람들은 생각밖에 거대한 규모에 놀라고, 거기에 비해 조선시대 왕릉은 비교적 작으며 아담하게 느끼곤 한다. 또 나처럼 열성적인 사람은 북한에 소재한 고려왕릉이나 고구려왕릉까지도 섭렵하여 상당한 지식과 안목을 쌓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황제릉을 처음 본 사람은 그 크기와 규모에서 압도당하게 마련이다. 유명한 진시황릉은 그 분묘만 해도 정방형으로 한 변의 길이가 350m에 높이는 76m인데 원래 축조되었을 당시에는 동서 485m, 남북은 515m이며 높이는 115m에 이르렀다. 크기로는 진시황릉이 단연 세계 최대이지만 높이는 이집트 쿠프 왕(B.C. 2580년 경)의 피라미드에 필적할 것이 없다. 이는 한 변이 230m이며 높이는 축조 당시 146.6m에 이르렀다. 이들 숫자는 단지 분묘만의 크기를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이집트나 중국의 경우 분묘 주변으로 장제전이나 부속건물들이 일개의 궁성만큼 넓고 건물이 많이 서 있었으며, 그 일대에는 능을 가꾸고 관리하기 위한 능읍(陵邑) 즉, 작은 도시가 하나 생겨났다.
장대한 무릉(茂陵)
무릉은 한나라의 제릉(帝陵) 중에서 오늘날 가장 정비가 잘되어 있다. 전한시대의 대표적인 황제릉의 하나로 섬서성 흥평시 남위진에 있다. 무릉을 처음 찾았던 것은 2003년이다. 이 때만 해도 ‘무릉박물관’으로 가는 길에 아무런 표지도 없고 황량한 민둥산 모양의 분구 상태였다. 이에 큰 관심을 갖지 않고 곽거병(霍去病)의 석조각을 보기 위해 원경으로 사진만 찍고 지나쳤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나 2015년에 재방문했을 때는 상전벽해가 따로 없다. 이제는 번듯하게 담장과 출입구는 물론 경내에 수목도 많이 심고 가꾸어 황제릉다운 모양새를 갖추었으며 입장료도 받고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이 일대는 한나라 황제와 황후, 배장 신하들의 묘가 산재되어 있는 곳이다. 그 모양이 피라미드의 정상부를 도려낸 형태를 지닌 것이 수백 기나 산재되어 있어 2차 세계대전 중 미국 항공기가 공중촬영을 한 것을 보고 피라미드 군락이라고 보고되어 소동이 일어난 적도 있다. 사실 이 시안의 능들은 흙으로 쌓은 피라미드 모양인데 정상부만 복두형(覆斗形)으로 잘려져 있어 위에서 보면 영락없이 이집트의 피라미드로 보이게 된다.
『금사(金史)』와 『송사(宋史)』에는 모두 휘종의 죽음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지만 죽은 날짜는 다르다. 송사에서는 4월 갑자일에 죽었다고 했으나 금사에서는 4월 병인일에 죽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송사에서는 죽은 뒤 2년이나 지나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금나라의 기록이 맞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휘종은 1135년 4월 23일에 죽은 것이다. 비록 휘종은 이국땅에서 망국의 한을 품고 죽었지만 그 재궁은 1142년 남송에 보내져 영우릉(永祐陵)에서 안식을 찾을 수 있었다.
휘종에 비하여 흠종의 죽음에 대하여는 불확실한 점이 더 많다. 일설에는 오국성에서 죽었다고 하지만 금사에는 연경으로 옮겨 살다가 1161년 병사해 금에서 장례를 치러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행히 『송사(宋史)』에 다음과 같은 단편적인 기록이 있어 전모를 짐작할 수 있다.
소흥 31년(1161) 5월 신묘일에 흠종의 붕어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다. 같은 해 7월 기축일에 존시를 올려 恭文順德仁孝皇帝라 하고 묘호(廟號)는 흠종이라 하였다. 소흥 32년(1162) 윤2월 무인일에 태묘에 부(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