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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심리학/정신분석학 > 교양 심리학
· ISBN : 9791192465005
· 쪽수 : 453쪽
· 출판일 : 2022-08-12
책 소개
목차
추천의 말
머리말
시작
1. 윌러드 식당에서의 일요일 저녁 식사
2. 침묵의 역할극
3. 자정의 드라이브
4. 우익에서 본 풍경
5. 현대 의학의 기적
6. CBS 저녁 뉴스
7. 뉴잉글랜드
8. 철갑옷
9. 새벽
10. 사고 실험
11. 마음속의 심연
12. 점진적 쇠퇴
13. 끝과 시작
14. 내게 남은 시간
맺음말
감사의 말
책속에서
“스티브.”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인생에는 종종 이해하기 힘든 경험이나 상황이 있기 마련이란다.” 놀랍게도 아버지는 신중하게 말을 고르고 있었다. 평소 철학과 과학에 관해 장광설을 늘어놓을 때와는 딴판이었다.
“그러니까 말이다, 이제 슬슬 너한테도 내 인생의 몇몇 사건에 관해 이야기해줘야 할 것 같아서.” 아버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가끔씩 정신이 온전하지 못할 때가 있었단다.”
아버지가 말을 이어가는 동안 시간이 점점 더 느리게 흘렀다. 세상이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빠르게 눈앞을 스쳐갔다. 힌쇼 집안의 이런저런 고난과 성취에 관해서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종종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항상 그 이야기에는 뭔가 빠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아버지의 기묘한 실종에 관해서 말이다. 아버지는 몇 주 혹은 몇 달씩 종적을 감췄지만, 나는 그 문제에 관해서 아무런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아버지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공포에 휩싸였지만 한편으로 기묘하고 강렬한 평온함을 느꼈다. 이제야 뭔가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평생 무시하려고 애썼던 내 등 뒤의 거대한 진공에 미세하게나마 숨구멍이 생긴 듯했다. 마침내 그 공극孔隙에서 몇 마디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적어도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내 삶이 완전히 달라지리라는 것 말이다.
아무도 우리 집에 문제가 생겼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우리 모두는 심각한 역할극에 가담하고 있었다. 불편한 의상을 차려입고 리허설도 없이 당혹스러운 장면들을 연기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결국 연기하지 않는 척하는 연기를 하고 완벽한 상상의 역할극을 상연하기에 이르렀다. 모든 공연이 실황이었다. 우리는 공연의 성공에 목숨이라도 달린 것처럼 온 힘을 다해 맡은 역할을 연기했다. 어째서 우리 가족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계속 그렇게 수수께끼로 남아야 했던 걸까? 침묵 뒤에 숨겨진 것이 무엇이든 간에 매우 끔찍하리라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그 정체가 만천하에 드러난다면 우리 가족은 무너질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