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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92828350
· 쪽수 : 324쪽
· 출판일 : 2023-11-30
책 소개
목차
작가의 말
1~12 / 11
저자소개
책속에서
그는 자리에 누워 몸을 뒤척거리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동생들은 곁에서 고운 단잠에 빠져 있었다. 동생들의 숨소리는 낮게 가라앉은 밤의 적막을 흔들어대었다. 방 안에는 농밀한 어둠의 입자들로 가득했다. 그는 큰대로 누워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는 중얼거렸다.
“그래도 길은 있는 것이여.”
‘순임아, 네가 말한 대로 나는 못생겼다. 그래서 나는 니 가까운 친구가 될 수 없다. 니가 싫다고 허면 나는 니 가까이 가지 않을 것이니께 그렇게 알고 있거라잉. 못생긴 사람은 아나운서가 되어도 별 볼 일 없다고 허드라. 그래서 그 꿈도 포기헐란다. 지금은 이광재, 임택근 시대가 아니니께 말이여. 순임이, 너는 모를 것이다잉. 내가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 말이여. 작가가 되는 디는 얼굴이 필요 없다는 것을 알기나 허냐. 그러나 나는 작가가 되지 않을란다. 그게 싫단 말이시. 글먼 뭐가 되고 싶냐고? 궁금허냐? 나는 판사가 될란다. 공부는 잘허니께 가능허겄지야. 법대를 나와 사법고시에 합격허면 되지 않겄냐.’
산외에서 태인까지는 버스로 50분 거리이다. 통학 거리치고는 꽤 먼 거리이다. 그는 일찍 밥을 먹고 나와 첫차를 기다렸다. 마을 앞에서 서성이며 한참을 기다리자 버스가 종산리 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입학식 첫날의 등굣길! 생각만 해도 가슴이 울렁거렸다. 얼마나 간절히 기다려 왔던가. 입고 싶었던 검정 교복과 쓰고 싶었던 검정 교모. 그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통 까만 자기 모습을 위아래로 내리훑었다.
‘내가 이 교복을 입기 위해 면사무소에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고생헌 것을 사람들은 모를 것이구만. 내가 면사무소를 그만두었으니께 그 뒤를 잇는 사람이 직사허게 고생헐 것인디 말이여. 세상은 불공평허다니께. 똑같은 사람인디 누구는 괄시 받고 누구는 아부 받고 말이여.’
버스가 와서 멎었다. 차내는 헐렁하게 비어 있었다. 그는 버스 가운데 부분에 앉았다. 차창에는 뿌옇게 김이 서려 있었다. 손등으로 쓱 문지르자, 바깥 풍경이 손바닥만 하게 다가왔다. 키 재기를 하는 산들이 빠르게 다가왔다 사라졌다.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버스가 심하게 흔들렸다. 팔을 엇걸어 팔짱을 끼고는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눈썹 같은 저 달이 점점 가늘어지다 나중에는 보이지 않는 것처럼 나도 시나브로 쇠약해져가다 결국에는 죽고 말 것이구만. 마지막 잎새가 뚝 떨어지듯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갈 것이랑게. 그럼 내 영혼은 하늘을 훨훨 날아 저 반짝이는 별이 될 것이라구. 별이 되어 밤이면 밤마다 깜박거리며 눈물을 흘릴 것이라구. 처량허게 슬피 우는 내 모습을 사람들이 알아보기나 헐까. 나는 슬픈 존재라구. 마냥 눈물만을 흘리며 죽는 날을 기다려야 헌다니. 내가 죽으면 가족들은 얼마 동안 슬퍼허다 까마득히 잊어버릴 것이랑게. 내가 죽어도 이 세상은 변화가 없을 것이여. 나만 바람처럼 없어진다니께. 거대한 우주 속에서 나의 존재는 티끌과 같다구.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가. 나는 사라져가고 있다니께. 죽어가고 있단 말이시. TV에 나오는 개그와 대중가요와 광고 방송과 멜로 드라마와 그런 것들은 내가 죽어도 여전히 그 자리 거기에서 흘러나올 것이라구. 죽음이란 이처럼 비참허고 슬픈 것을! 한 줄기 푸른 달개비, 연약혀 보이지만 얼마나 아름다운 생명인가. 그렇게라도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생명이 있는 것이면 모두가 아름답게만 보인다. 위대허게 보인다니께. 나무와 풀과 새와 잠자리와 사자와 두꺼비와 지렁이와 그런 모든 살아있는 것들. 귀허고 천박함을 떠나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위대허게 보인다니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