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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조선사 > 조선중기(임진왜란~경종)
· ISBN : 9791192852003
· 쪽수 : 324쪽
· 출판일 : 2022-12-28
책 소개
목차
제1막 혹리(酷吏)
최종병기 활/ 정묘호란/ 인조반정/ 급박한 처형/ 냉혹한 집행/ 정형(正刑)/ 궁금증
제2막 역사의 장막
박엽이란 사람/ 다른 시각의 단초/ 정사(正史) 속엔/ 광해군 때/ 확연한 차이/ 집요한 탄핵/ 살얼음판/ 심하전역/ 더 막중해졌다/ 부정적인 눈/ 부정 축재자/ 기록의 편향성
제3막 민民의 마음
주입된 기억/ 민심의 향방/ 변화의 조짐/ 채제공의 박엽/ 야담 속으로/ 동야휘집/ 잘못된 점괘/ 개인의 기록엔/ 감춰진 능력/ 시대의 가치
제4막 상처 난 얼굴
어려서부터/ 친구들의 증언/ 다정다감/ 전란을 거치며/ 친구 허균/ 중국문학 소개/ 고독한 속마음/ 심하의 변명/ 최명길의 탄식/ 만리장성
제5막 원래의 얼굴 찾기
역사의 해원/ 시간의 힘/ 마침내 사면/ 최남선의 평가/ 대동문의 증언/ 종착역/ 조선의 만리장성/ 육군 대장 갑질 사건/ 그 얼굴에 햇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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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소환된 박엽 · 박종인(조선일보 선임기자)
추천사/ 400년을 뛰어넘은 박엽 장군과의 만남 · 박찬주(전 육군 대장)
후기
참고문헌
저자소개
책속에서
박엽은 광해군과 인척 관계의 가까운 인물이면서 동시에 조선시대에 가장 강력한 병력을 지휘하는 무장(武將)이었기 때문에, 반정으로 권력을 장악한 서인 세력들에게는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그래서 박엽의 문제점들을 실상보다 과장하고 이를 빌미로 박엽을 처단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인조와 반정 세력이 처한 정치 상황을 감안할 때 박엽을 나쁘게 묘사하고 그를 재빨리 죽여야 하는 단서를 그 속에서 찾아볼 수도 있다. 즉 반정으로 집권을 하면 가장 중요한 일이 당시까지 조선의 종주국인 명나라의 인정을 받는 것인데, 그러려면 명과 후금 사이에서 이른바 중립 외교를 펼쳤던 광해군에게 비교해 볼 때 인조 자신은 정치 외교적 입장에서 근본적으로 차이가 난다는 점을 명나라에 더 명확히 보여주려면 광해군과 가까웠고 광해군의 외교의 최전선에서 활약(?)한 박엽을 처단하는 것은 정권을 차지한 이후의 첫 번째 과제로 결행해야 한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박엽은 인조반정의 희생양으로 지목되어 집중적인 지탄을 받았지만, 오랜 세월 관료 생활을 통해 탁월한 행정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국경 방비에 필수적인 축성(築城)과 양전(量田), 곧 전투식량의 확보와 비축 등 군사 관련 업무에서 두각을 보였다. 일찍이 1612년 호조(戶曹)에서 박엽을 호남의 양전사(量田使)로 추천하면서 “재국(才局)이 매우 민첩하고 산법(算法)에 밝아 양전의 임무를 맡기기에 가장 적합한 자”라 한 말이 있음이 그 증거이다. 실제로 영조 때에 박엽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있었다. 영조 6년(1730년) 11월에 삼남 지방의 토지와 수확된 양곡의 차이가 심각해 이를 해결할 방도로 양전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신사철(申思喆, 1671~1759)이 영조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다;
“갑술년 양전 시기에 박엽이 균전사가 되어 처음 법을 시행할 때 많은 이를 죽여 그 당시 울던 아이도 울음을 그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양전이 다 끝나고 나니 백성이 손해 보는 일이 없고 요역이 공평하게 되어 이로써 원망하는 말이 없어졌습니다. (이와 같으니) 대개 양전은 반드시 행하여야 하는 일입니다.”
박엽이 그만큼 엄정하게 양전 업무를 수행했다는 평가가 그의 사후 100여 년 만에 회의에서 나온 것이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 대군의 힘을 고려해 결사 항전이 아니라 화의를 주장해 관철한 최명길에 대한 재조명이 서적과 영화로 나와 최명길이 박엽에 대해 가졌던 생각이 재조명되고 있는데, 최명길이 인조반정 때 벌써 그를 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주목받고 있다.
반정 직후인 1623년 3월 12일 당시 병조 좌랑으로서 반정 세력의 일원이었던 최명길은 반정의 주동자였던 강계 부사 김류에게 “향후 나라에 병란으로 오랑캐가 염려스럽다. 장수의 지략을 가진 사람은 살려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다”라고 장수의 지략을 가진 박엽을 살려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류는 박엽이 광해군에 충성한 자라 반혁명을 일으키지 않을까 염려했고 3월 13일 박엽은 부임지 평양에서 도원수 한준겸에 의해 처형됐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날 무렵 최명길은 김류에게 다시 편지를 보내, “만일 박엽이 살아있었다면 정묘호란도 없었을 것이고 오늘의 이런 우환도 없었을 것입니다.”라고 썼다. 인조반정 1등 공신 최명길이 광해군의 총애를 받고 양면성을 가진 박엽을 구명하려 한 것은 그의 능력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더구나 후금의 침략을 예측하였기에 그의 존재가 더욱 절실했을 것이다. 비록 전 정권의 인물일지라도 경험과 능력이 국가 위기를 극복하는 데 필요하다면 주저 없이 등용하는 게 최명길의 인사 철학이었다. 최명길은 정치와 외교의 요체가 뭔지를 아는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