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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외국시
· ISBN : 9791192884462
· 쪽수 : 432쪽
· 출판일 : 2025-08-18
책 소개
1956년 퓰리처상, 1970년 전미도서상 등을 수상한 ‘유명’ 시인 비숍의 작품 세계는 사후 발굴된 편지와 미발표 원고, 전기와 비평을 통해 그의 레즈비언 정체성이 드러나면서 더 확장되었다. 에이드리언 리치는 1983년에 나온 비숍 전집에 부친 한 비평에서 “지금에야 비로소 우리는 비숍을 남성 시인의 정전에서 인정받은 소수의 ‘예외적’ 여성으로서만이 아니라, 여성이자 레즈비언 전통의 일환으로도 읽을 수 있게 되었다”라고 평한다. 리치는 이 글을 통해 ‘남성’ 문인으로부터 절제와 경계심을 칭송받으며 ‘여성적’ 글쓰기를 지향한 것으로 평가되던 비숍을, 위계와 경계성을 의식적으로 탐색한 국외자, 외부자, 주변인으로 재위치시켰다. 비숍은 2008년 라이브러리오브아메리카(Library of America)가 출판한 최초의 여성 시인으로 ‘이름’을 올렸고 2012년엔 미국 우표에 ‘얼굴’을 올리며 미국 현대 문학의 아이콘으로 남았다. 비숍의 시는 단지 ‘훌륭한’ 수준이 아니라 ‘정직하고 용기 있는’ 작품으로 재평가되었다.
비숍은 생후 8개월 때 아버지를 잃었다. 어머니는 비숍이 5세 되던 해부터 사망 때까지 20여 년간 정신병원에서 지냈다. 비숍에겐 진짜 집이 없었다. 노바스코샤에 있는 외조부모의 집, 매사추세츠주 우스터에 있는 친조부모의 집, 모드 이모가 살고 그레이스 이모가 비숍을 돌보러 와준 보스턴의 바닷가 집을 전전하며 유년을 보냈다. 천식과 습진 증세가 심해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어린 비숍은 크고 냉담한 친가를 떠나 다정한 이모들과 지내는 것이 좋았고 그 때문에 이모부의 학대를 숨겼고, 그럼에도 살아남았다. 학창 시절엔 텅 빈 기숙사에서 지내거나 친구 집에 얹혀살았고 보스턴의 저렴한 호텔에서 홀로 휴일을 보냈다. 처음 시집을 출판한 1930년대 중반부터 여행을 시작한 비숍은 바서칼리지 동창 루이즈 크레인을 따라 플로리다에 갔고 그곳에서 키웨스트를 발견했다. 비숍은 고립감과 해방감을 동시에 주는 섬에 끌렸고 크레인과 헤어진 뒤로도 10여 년간 키웨스트를 찾았다. 전쟁 중에도 비숍의 여행은 계속됐지만 그의 건강은 우울증, 알코올의존증, 천식으로 점차 악화됐다. 1942년부터는 거의 쓰지 못하는 불능 상태가 되었고 1946년엔 술 문제로 정신병원에 두 달간 입원했다. 더는 길이 없다고 느낀 1951년, 비숍은 충동적으로 브라질로 향했고, 리우데자네이루주에서 일생의 연인 로타 지 마세두 소아리스를 만난다. 지주이자 미술품 수집가였던 소아리스는 리우데자네이루 외곽 산속에 비숍을 위한 작업실을 지어주었고, 그곳이 비숍에게 완벽한 섬이자 마침내 얻게 된 집이 되었다.
비숍의 브라질 시기 시들은 1950년대 후반부터 발표되어 시집 『여행의 질문들』(1965)에 수록된다. 시집의 출간 무렵 멀어지던 비숍과 소아리스는 비숍의 외도로 인해 결별에 이른다. 그 후 천식 발작이 심해진 비숍과 정신적으로 무너진 로타는 격리와 재회를 반복하다가, 1967년 가을 미국에 있는 비숍을 방문한 로타가 다음 날 쓰러져 생을 달리하면서 영원히 이별한다. 안 그래도 죄책감에 사로잡힌 비숍은 로타의 친구들로부터 비난받았고 두 사람 사이에 별일이 없었음을 항변해야 했다. 로타가 떠난 그해 크리스마스 직후 비숍은 로타를 질투심으로 무너뜨린 외도 상대와 동거를 시작했지만 그 관계는 재앙으로 끝났다.
비숍은 1970년부터 하버드에서 작문 강의를 했다. 비숍의 오랜 친우이고 하버드의 교사이자 시인으로 자리 잡은 로버트 로웰이 마련해 준 자리였다(두 사람의 편지는 책으로도 출간됐다). 캠퍼스에 있는 동안 비숍은 다시 쓰기 시작해 더디지만 인생 시들을 완성해 냈다. 1972년 비숍은 “정말로 좋아하는 시라 완성하고 싶었던” 「큰사슴」(그레이스 이모에게 헌정한 시)을 25년 만에 마무리해 발표한다. 10년간 쓴 10여 편의 시를 담은 마지막 시집 『지리 Ⅲ』(1976)은 “덜 형식적이고 더 ‘열린’” “감정이 더 넓게 많이 담긴” 시라는 평을 듣는다. 이 시집은 당시 연인이었던 하버드의 행정 보조 앨리스 메스페슬에게 헌정된다. 비숍의 불길한 예감대로 메스페슬에게 새 이성 연인이 생기면서 끝나는가 싶었던 둘의 관계는 비숍의 약물 과다복용 사건 등을 거치며 재개되어, 1년 반 뒤 비숍이 뇌동맥류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지속된다.
옮긴이 이주혜는 ‘옮긴이의 글’에서 비숍을 끝없이 여행에 나서게 한 진정한 추동력이 무엇일지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시를 옮겼다고 고백한다. 단어 하나, 표현 하나를 두고 고심을 거듭한 흔적이 남은 비숍의 친필 원고들을 들여다보며 어떤 위안을 얻기도 했다고 전한다. “시인은 역설적인 질문을 통해 자신이 끝없이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상상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원형의 집을 꿈꾸고 찾아내기 위한 지극한 상상력이라고 항변하는 듯하다. 그 여정이 어떤 불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을지라도 끝내 포기하지 않겠다는 다점마저 엿보인다.” 에이드리언 리치의 비숍 비평을 한국어로 옮겼고(『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비숍의 시 「세스티나」에서 가져온 제목으로 첫 산문집을 출간하고 첫 꼭지를 비숍에 대해 썼던(『눈물을 심어본 적 있는 당신에게』) 이주혜의 마음을 다한 섬세한 번역이, 너무 유명하지만 아직 새로운 비숍을 비로소 만나는 감동을 배가시킨다.
사후인 1981년에 공개된 1978년의 『파리 리뷰』 인터뷰에서 비숍은 스스로를 언제나 강력한 페미니스트라고 여겨왔다고 말한다. 어느 기자가 자기를 에리카 종이나 에이드리언 리치와는 대조되는 ‘구식’으로 보이고 싶어 하는 것을 느꼈다면서, “시가 선전 선동이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한 것이 “시가 개인의 철학을 전달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로 기사화된 사례를 전한다. 자기를 드러내는 것에 소극적이었고 많은 작품을 공개하지 않은 수줍음과 절제, 과작의 시인 비숍이 그의 사후 펼쳐진 비숍 현상을 본다면 뭐라고 할까. 독자로서는 다행이고 행운이지만 이 시만은 빼주세요, 외치는 비숍이 상상되기도 한다. 현존하는 엘리자베스 비숍 시 전집의 최종판인 『우리는 내륙으로 질주한다』는 태어난 지는 115년, 사망한 지는 50년이 되어가는 엘리자베스 비숍의 현재적 위치로 각자인 독자를 데려간다. 이제 독자 각자가 ‘구식’이기는커녕 너무 모던한 비숍의 작품을 만나 “정직하고 용기 있게” 읽을 차례다.
목차
출간에 부치는 글
『시 전집』(1969)
『북과 남』(1946)
지도 | 상상의 빙산 | 카사비앙카 | 공기가 차가울수록 | 웰플리트를 걸으며 | 슈맹 드 페르 | 샬럿의 신사 | 크고 나쁜 그림 | 시골에서 도시까지 | 사람-나방 | 사랑은 누워서 잔다 | 아침 식사의 기적 | 잡초 | 불신자 | 기념비 | 파리, 오전 7시 | 오를레앙 강변로 | 천장에서 잠들기 | 선 채로 잠들기 | 겨울 서커스 | 플로리다 | 헤로니모의 집 | 수탉들 | 바다 풍경 | 작은 연습 | 물고기 | 늦은 방송 | 쿠치 | 유색인 가수를 위한 노래 | 조응
『어느 차가운 봄』(1955)
어느 차가운 봄 | 2000점 이상의 삽화와 주석 모음 | 만 | 여름의 꿈 | 생선 창고에서 | 케이프브레턴 | 의회도서관에서 바라본 국회의사당의 전경 | 불면증 | 탕아 | 파우스티나 혹은 바위장미 | 배릭 스트리트 | 시 네 편 | N.Y.로 보내는 편지 | 언쟁 | 미스 메리앤 무어에게 보내는 초대장 | 샴푸
『여행의 질문들』(1965)
상투스에 도착 | 브라질, 1502년 1월 1일 | 여행의 질문들 | 무단 점유자의 아이들 | 마누에우지뉴 | 뇌우 | 우기의 노래 | 아르마딜로 | 강사람 | 십이일절 아침: 당신 뜻대로 | 바빌론의 도둑 | 예절 | 세스티나 | 노바스코샤의 첫 죽음 | 주유소 | 일요일, 새벽 4시 | 도요새 | 트롤로프의 일기에서 | 세인트 엘리자베스 병원에 가다
시집에 묶이지 않은 새 작업(1969)
우기: 아열대 | 쥐의 교수형 | 어떤 꿈을 그들은 잊었다 | 노래 | 유숙객 | 트루베 | 빵집에 가다 | 창문 아래서: 오루프레투
『지리 III』(1976)
대기실에서 | 영국으로 돌아온 크루소 | 밤의 도시 | 큰사슴 | 12시 뉴스 | 시 | 한 가지 기술 |
3월의 끝 | 사물과 유령들 | 다섯 층 위
시집에 묶이지 않은 새 시들(1978-1979)
산타렝 | 노스헤이번 | 분홍 개 | 소네트
시집에 묶이지 않은 시들(1933-1969)
홍수 | 당신과의 대화 | 성모 찬가 | 눈을 위한 세 편의 소네트 | 세 번의 밸런타인 | 질책 | 산 | 재치 | 모자 바꿔 쓰기 | 북풍—키웨스트 | 감사 편지
부록: 미출간 친필 원고 시들
옮긴이의 말
책속에서
거기 사는 더러운 은둔자가
오래된 눈물처럼 누워서
세월이 흐를수록 분명해지는
상처들에 매달려 있었다.
_「슈맹 드 페르」
당신이 눈여겨보지 않으면 그는 몰래 눈물을 훔치다가
눈물을 삼킬 것이다. 하지만 지켜보면 건네줄 것이다.
지하수처럼 차갑고 마실 수 있을 만큼 순수한 눈물을.
_「사람-나방」
잡초는 온통 젖은 고개를 들고
(내 생각들로 젖은 걸까?)
대답했어. “나는 자랍니다.” 그것이 말했어.
“당신 심장을 다시 쪼개려고요.”
_「잡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