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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93646083
· 쪽수 : 204쪽
· 출판일 : 2025-07-14
책 소개
목차
이주혜 할리와 로사
정선임 해변의 오리배
김이설 최선의 합주
얽힘 코멘터리
기획의 말
리뷰
책속에서
이주혜 「할리와 로사」
할리는 영영분식의 사장님이 그렇게 많이 시켜서 다 먹을 수나 있겠느냐고 물어보지 않아서 좋았다. 로사와 둘이 식당에 가서 양껏 시켰다가 다 먹을 수 있겠느냐는 쓸데없는 질문이나 무슨 아가씨들이 이렇게 많이 먹느냐, 그래서 애인이 생기겠느냐는 무례한 말까지 들으면 당장 입맛이 달아났고, 보란 듯이 꾸역꾸역 먹다가 체한 일도 많았다.
우리에겐 선택지가 두 개 있어. 하나는 다시 한옥마을로 돌아가 한지길을 훑어 보고, 내처 경기전과 전동성당까지 보는 다소 빤한 관광 코스야. 또 하나는 한옥마을 반대쪽으로 가서 치명자산 천주교 성지를 보고 오는 아주 특별하고 거룩하며 기억에 남을 만한 코스고. 할리는 로사의 말솜씨에 웃음을 터뜨렸다. 웃을 일은 아니야. 아무래도 산이라 올라가기가 쉽지는 않거든. 괜찮겠어? 그 저질 체력으로 괜찮겠냐는 말일 것이다. 할리는 잠시 망설였다. 한옥마을 방향을 굽어보고 이내 몸을 돌려 치명자산 쪽을 올려다보았다. 가능하면 낯선 방향으로. 할리는 저절로 떠오른 그 말을 구호 삼아 따르기로 했다.
저 아래 시내에 불빛이 하나둘 켜졌다. 건물들은 이제 별자리처럼 이어지는 조명의 윤곽으로만 남았다. 할리는 빛과 어둠의 교대식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고작 흙 한 줌이 돌아왔는데, 그것을 우리는 귀향이라 부를 수 있을까? 할리는 자기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무엇을 참는지도 모르고 한껏 참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