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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92968995
· 쪽수 : 84쪽
· 출판일 : 2023-12-22
책 소개
목차
스마일 마켓
손가락
해설: 부재가 아닌 무능과 과잉으로부터의 서사_임현(소설가)
작가의 말
저자소개
책속에서
“그렇지. 총을 쏠 놈이었으면 진작 쐈지. 그깟 쓰레깃더미나 페인트를 들이붓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깟 쓰레깃더미라고 했습니까?”
결국 태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쓰레기 치우고 페인트 지우는 데만 얼마나 들었는지 아느냐고 태오는 소리쳤다. 그렇게 태평하게 있다가 당하지 말고 좀 진지하게 생각해보라고도 했다. 물론 사람들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다. 그들은 단지 걱정과 조바심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삼십여 년 전 타운을 휩쓸고 간 태풍을 잊은 사람은 없으니까. 모든 것을 잃은 그때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아악!”
여자의 목소리는 절박했다. 흑인 남녀가 쓰러진 여자의 다리를 밟아 뭉개고 있었다. 태오가 옆에 있는데도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반사적으로 여자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 태오가 그들을 힘껏 밀쳤다. 키가 크고 건장한 남자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여자만이 뒤로 약간 밀려났을 뿐이었다. 그러나 무슨 짓이냐고, 왜 그러느냐고 외치던 태오 역시 어느 순간 길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Kung Flu.”
남자의 목소리가 아득해지는 것을 들으며 태오는 의식을 잃었다. 그의 머릿속은 여러 편의 영화를 동시에 상영하는 스크린처럼 정신이 없었다. 인과를 알 수 없는, 장면이 뒤엉킨 이상한 영상으로 범벅이 되었다. 태오가 눈을 떴을 때 흑인 남녀는 자리를 떠나고 없었다.
그때마다 그는 마른걸레와 소독액이 담긴 통을 들었다. 출입문 손잡이와 자잘한 물건이 정리된 선반과 계산대에 소독액을 뿌리고 마른 수건으로 여러 번 문질렀다. 아무리 뿌리고 닦아도 그 일이 벌어지기 전의 청결함을 느낄 수 없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미세먼지가 폴폴 날리는 마당에 서 있는 것처럼 껄끄러운 느낌. 그때마다 태오는 화장실로 가 비누칠한 손을 세심하게 문질렀다. 손바닥과 손가락 사이사이, 손톱 밑까지 문지르고 또 문질렀다. 그러는 동안 언뜻언뜻 묻어두고 싶은 장면들이 떠올랐다. 거대한 몸을 가진 두 남녀가 여자의 다리를 짓이기는 장면과 태오 자신을 향해 주먹을 날리던 모습, 흑인 여자가 퉤퉤 침을 뱉으며 돌아서던 모습도 보였다. 침 멀리 뱉기 시합이라도 하는 것처럼 흑인 여자는 온 힘을 다해 침을 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