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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문학의 이해 > 비평론
· ISBN : 9791192986418
· 쪽수 : 213쪽
· 출판일 : 2025-06-30
책 소개
목차
ㅣ들어가며ㅣ _ 9
첫 번째 우물 말이 통하는 것은 힘들다
「존 윌킨스의 분석적 언어」 _ 13
두 번째 우물 새로 읽어 새로 쓰기, 그런 다음 또 새로 읽어 새로 쓰기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_ 29
세 번째 우물 책을 읽듯 세계를 읽으려고 했으나
「바벨의 도서관」 _ 47
네 번째 우물 번역을 통해 새로운 세계로
「아베로에스의 모색」 _ 65
다섯 번째 우물 가능성이 우글대는 미로 속에서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이 있는 정원」 _ 83
여섯 번째 우물 불확실성을 떠안기
「바빌로니아의 복권」 _ 101
일곱 번째 우물 기억한다는 것, 생각한다는 것
「기억의 천재 푸네스」 _ 119
여덟 번째 우물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엠마 순스」 _ 137
아홉 번째 우물 타자 안에 있는 나, 내 안에 있는 타자
「알모타심에게 다가가기」 _ 155
열 번째 우물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 그리고 희망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 _ 171
열한 번째 우물 불에 타지 않는 꿈
「원형의 폐허들」 _ 195
ㅣ나가며ㅣ _ 211
저자소개
책속에서
-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작품을 읽는다는 것이 작품을 구성하는 기호만을 소리 내어 읽음을 뜻하지 않음은 자명하다. 이제 막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어린아이가 보르헤스의 소설을 큰 소리로 읽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이 진정한 ‘작품 읽기’가 아니라는 점을 안다.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작품에서 무언가를 읽어내는 것을 뜻하며, 그 ‘무언가’에 해당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선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많은 경우 독자가 작품에서 읽어내고자 하는 무언가를 작가의 의도라고 이해한다. 독자는 작품을 마음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독자는 작가가 작품을 통해 의도하는 바를 임의적 개입이나 주관적 판단 없이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포착해야 하는 의무를 진다. 예컨대 현진건은 「운수 좋은 날」을 통해 일제 치하에서 조선 민중이 얼마나 비참한 삶을 사는지를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자 했다. 이것이 현진건의 의도라고 할 때, 「운수 좋은 날」을 읽고 나서 ‘김 첨지는 가정 폭력범인데? 죽은 아내의 따귀를 때려?’라는 반응을 보인다면 이 반응은 작가의 의도를 포착하지 못한, 따라서 작품을 잘못 읽는 행위에 해당한다.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작가의 의도 파악을 작품 읽기의 핵심으로 간주하는 일은 독서의 능동성을 약화하고, 작품에 대한 건전한 평가를 차단하며, 새로운 가치관을 통한 작품의 다각적 확장을 막지 않는가? 작가의 의도에 얽매이지 않고 독자 자신의 입장에서 작품을 새로이 읽는 일은 작가의 의도를 포착하는 일 이상으로 중요하며, 이렇게 새로이 읽을 때 원래의 작품은 새로운 작품으로 거듭나게 된다.” (두 번째 우물, ‘새로 읽어 새로 쓰기, 그런 다음 또 새로 읽어 새로 쓰기’의 ‘독법 1’ 중)
- “삼인칭이었던 소설의 화자는 소설의 말미에서 갑자기 보르헤스로 바뀐다. 보르헤스는 자신도 아베로에스와 다를 바 없다고 고백한다. 아베로에스라는 이슬람 철학자는 그리스를 모르면서도 그리스 철학 문헌을 번역하고자 했고, 보르헤스라는 아르헨티나 소설가는 이슬람도 모르고 다른 시대에 속하면서도 아베로에스를 이해하고자 한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이 속한 세계에 머무르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속하지 않은 세계를 탐색한다. 설령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하나의 세계에 갇히지 않고자 하는 이러한 모색이 바로 ‘아베로에스의 모색’이고, 이 이 모색이야말로 시의 본질, 은유의 본질, 번역의 본질이다.
이 모색의 실패는 예정되어 있다. 보르헤스는 아베로에스의 오역을 보고 아베로에스가 처한 상황을 떠올려 이 소설을 썼을 것이다. 하지만 보르헤스 자신이 말하듯, 보르헤스가 아베로에스에 대해 무엇을 알겠는가? “이 작품이 나를 비웃고 있다는 느낌”(130쪽)을 받으면서도, “짧은 글 몇 개 이외의 다른 자료”(130쪽)만으로 어떻게든 아베로에스를 그리려 했던 보르헤스의 시도에는 분명히 가치가 있으며, 이 시도 자체가 오늘날 아베로에스를 어떤 의미에서 존재하게 한다. 다른 세계에 있는 그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믿고 시도하는 것이야말로 그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듯, 은유와 번역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모색하는 것이야말로 그 세계의 존재를 가능하게 한다. 반복하여 말하지만, 오역은 비웃음거리가 아니다. 우리가 읽고 있는 이 소설이야말로 아베로에스의 오역이 있었기에 쓰일 수 있었다.” (네 번째 우물, ‘번역을 통해 새로운 세계로’의 ‘독법 2’ 중)
- “나에게 해를 가한 사람에게 사적으로 복수할 수도 있고, 공적 처벌이 이루어지도록 요청할 수도 있다. 「엠마 순스」의 엠마 순스와 <존 윅>(2014)의 존 윅은 전자를 택하며, <장화홍련전>의 장화와 홍련은 후자를 택한다. 무엇이 더 나은 선택지인가?
예)
내가 보기에는 장화와 홍련의 선택지가 더 낫다.
왜냐하면 사적 복수에는 공적 처벌에 수반되는 객관적 진상 규명의 과정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는 (엠마와 존/장화와 홍련)의 선택지가 더 낫다.
왜냐하면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때문이다.”
(여덟 번째 우물,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의 ‘확장’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