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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93235652
· 쪽수 : 368쪽
· 출판일 : 2025-09-29
책 소개
목차
내 목숨을 구하러 온 저승사자들
혀뿌리가 아릴 정도로 달게 사는 것이 인생!
비가 내리면 우리는 훌라를 추지
당신과 꼭 닮은 내가 여기 있다
지난날의 내가 오늘의 나를 강하게 만든다
작가의 말
저자소개
책속에서
저승사자가 데리러 올 거라는 생각은 왜 하지 못했을까. 누구에게나 죽음은 딱 한 번뿐이라 배달 후기처럼 진짜 리뷰를 확인할 수도 없다. 내가 아는 죽음이란 죽어본 적 없는 자들이 지어낸 이야기가 전부인 셈이었다. 그러니 근육질의 할머니라고 해서 저승사자가 아니란 법은 없었다. 드디어 죽을 수 있겠구나. 마음이 놓였다. 안도감에 눈이 스르륵 감겼다.
휘익, 짝!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왼쪽 볼에서 얼얼한 통증이 번져나갔다. 아팠다. 다 죽어가는 마당에 뺨을 맞다니. 이게 무슨 일이지. 눈에 힘을 주어 저승사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승사자의 머리엔 스포츠 헤어밴드가 둘리어 있었다. 가운데엔 큼직한 나이키 로고가 박음질돼 있었고, 그 위로 아주 미세하게 검은 실밥 하나가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죽음을 앞둔 순간에도 그런 게 눈에 들어오다니.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저승사자의 한마디에 그 웃음은 쏙 들어갔다.
“정신 단단히 차려라.”
(39~40쪽)
하루빨리 도시로 돌아가, 내 방식대로 세상과 작별하고 싶다는 마음과 달리, 내 눈은 뚫어지게 물회를 바라보고 있었다. 높게 쌓아 올린 경계심도 살얼음 국물과 함께 스르르 녹아내리기 바빴다. 붉게 살얼음 낀 국물, 얇게 썬 당근과 오이, 양배추와 청양고추, 얇게 저며져 꽃잎처럼 단정히 놓인 전복회, 그리고 아이스크림 스쿠프로 퍼 얹은 듯 둥글게 뭉쳐 올린 투명한 오징어회까지.
꼬르륵. 뱃속이 더 큰 소리를 내며 울었고, 이를 신호탄 삼아 내 손이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숟가락은 그릇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그 안에 든 것을 힘껏 퍼 올렸다. 숟가락 위엔 밥과 채소, 오징어회가 보기 좋게 올라갔다. 자동문이 열리듯 내 입이 쩍 벌어졌고, 그 안으로 물회를 이루던 재료들이 한입 가득 들어찼다. 적당한 간격으로 알알이 씹히는 쌀알, 부드럽게 구부러지는 채소들의 아삭함, 그리고 탱글탱글 살아 있는 오징어의 탄력까지. 입안에 여름 바다가 찰랑거렸다.
(66쪽)
영춘 어르신은 찬장에 있던 도자기 찻잔 두 개를 꺼냈다. 덖은 찻잎을 넣고, 조심스럽게 뜨거운 물을 부었다. 물이 닿자 찻잎이 부풀며 온갖 색이 퍼져나갔다. 하늘을 닮은 연한 하늘색에서, 짙은 바다의 색, 그러다 노을처럼 붉은빛이 감돌기도 하다가 이내 흙을 닮은 짙은 갈색으로 변했다.
“이 세상 전부를 품은 것 같지? 색깔도 다양하고 말이야.”
영춘 어르신은 찻잔 하나를 내게 건넸다. 나는 두 손으로 찻잔을 받쳐 들고 후후 불었다. 그러곤 호로록, 한 입을 마셨다. 나와 비슷한 속도로 차 한 모금을 마신 영춘 어르신이 조리대에 비스듬히 기댄 채 지그시 눈을 감고 말했다.
“어떠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몇 모금을 더 마시고 나서야 조심스럽게 답했다.
“맛이 없어요. 그러니까, 맛이라는 게 느껴지질 않아요.”
“오래전부터 우리 마을 사람들은 그렇게 믿어왔어. 이름 없는 풀이 세상의 향과 빛깔을 다 담아내서, 오히려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는 거라고. 너무 많은 걸 품으면, 끝내는 아무것도 아닌 게 돼버리는 거지. 비워서 빈 게 아니라, 가득 채워서 빈 거야. 그 모든 것이자, 아무것도 아닌 걸 들이켜는 거야.”
“모든 것이자, 아무것도 아닌 것.”
(129~130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