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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70321019
· 쪽수 : 542쪽
· 출판일 : 2024-01-26
책 소개
목차
책머리에 | 김호운(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
강원일보 임희강┃시계視界를 넘어
경남신문 곽민주┃인어의 시간
경상일보 강세영┃마리모
경인일보 이준아┃하찮은 진심
경향신문 허성환┃i
광남일보 김진표┃필인더블랭크
광주일보 유재연┃벽장 밖은 어디로
국제신문 김슬기┃공존
농민신문 곽재민┃내규에 따라
동아일보 임택수┃오랜 날 오랜 밤
매일신문 홍기라┃안나의 방
무등일보 정대성┃러닝
문화일보 기명진┃유명한 기름집
부산일보 조성백┃6이 나올 때까지
불교신문 김성희┃나비춤
서울신문 이지혜┃북바인딩 수업
세계일보 유호민┃붉은 베리야
영남일보 이수정┃코타키나발루의 봄
전라매일신문 이은정┃커튼이 없는 방
전북도민일보 김하진┃우는 여인
전북일보 신가람┃미지의 여행
조선일보 권희진┃러브레터
한국일보 김영은┃말을 하자면
한라일보 윤호준┃상구와 상순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혜진은 대단한 부자가 되기를 꿈꾸며 집 주인이 된 건 아니었다. 그저 원룸이 불편했고 전세금을 떼이는 게 불안했다. 저녁으로 먹은 생선 냄새 정도는 환기시킬 수 있는 넉넉한 공간의 주거 시설에서 살고 싶었다. 혜진은 비싸지 않은 외곽의 아파트를 매수했고 그곳은 곧 정비예정구역으로 지정됐다. 아파트 곳곳에 안전진단을 준비한다는 현수막이 붙었고 여러 부동산에서 매도를 권유하는 전화를 걸어왔다.
혜진은 자연스럽게 갈아타기를 거듭하며 금세 목돈을 마련했다. 적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속도였다. 혜진은 스스로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아파트 외에 투자한 낡은 다세대 주택도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강 할아버지 사건이 터졌지만 좀 놀랐을 뿐이지 금전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 건 아니었다. 상만은 이런 혜진의 사고방식에도 낯설다는 표현을 했다. (「시계(視界)를 넘어」)
아내의 손을 꽉 잡았다. 내 손과 아내의 손이 닿은 공간에 땀이 찼다. 우리의 모습을 차분히 지켜보고 있던 방사선사가 화면을 띄웠다. 우선 아기 크기를 재 볼 건데요. 여기 하얗게 보이는 게 위에서 본 머리뼈예요. 좀 더 내려오면……. 심장 뛰는 거 보이세요? 이쪽 아래가 배 부분이고요. 까맣게 보이는 게 위장이에요. 여기 보시면 양수를 먹기 때문에 위 안이 이렇게 차 있습니다. 여기가 머리고… 이게 뒤통수, 요게 정수리, 이 안에 하얀 거 보이시나요? 이게 코뼈 부분인데요. 뼈를 확인하는 이유는 이 주수에 코뼈가 안 보이는 아기들이 다운증후군이나 염색체 이상이 있을 가능성이 높아서 확인하는 거예요. 같은 의미로 목뼈 뒤에 투명한 이 부분을 확인해야 하는데 아기의 척추 뼈 일부가 불완전하게 닫혀서 척추가 노출되는 선천성 기형으로 개방성 이분 척추거나 폐쇄성 이분 척추인지 보는 거예요. 아기가 태어났을 때, 배뇨장애, 하지마비 같은 증상이 올 수 있거든요. 목뼈가 굽지 않고 반듯하네요. 크기도 주 차에 딱 알맞은 크기구요. 좋아요. 아주 좋아요. (「i」)
빈소 한편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피곤함이 몰려왔다. 나는 집어 삼켜지듯 잠에 빠져들었다. 꿈을 꾸었다. 나는 어린 시절 살았던 파란 양철 대문 집에 누워 있었다. 옷가지들과 책가방과 참고서들이 옛 모습 그대로 널브러져 있다. 그 사이에 20대에 썼던 물건들도 드문드문 섞여 있었다. 나는 꿈에서도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알지만 많은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가 사라지길 반복할 때마다 옛 마음이 되어 초조했다. 누군가 덕수야, 하며 잊고 있던 아버지의 이름을 나에게 다시 일깨워 줄 것만 같았다. 불쑥 스무 살 승환이 빈털터리가 되어 집으로 돌아와 울 것도 같았다. 꿈속에서의 나는 작은 몸뚱이를 가졌다. 현관문이 잘 보이는 쪽으로 몸을 가볍게 뒤집었다. 나는 현관 너머로 들려올 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빈 공간을 울리는 무수한 발소리 사이에서 고모의 것을 기다린다. 요란한 소리를 내는 알루미늄 문이 열리고, 하루의 고단한 냄새를 끌어안고 돌아올 고모. 나는 고모의 젊은 시절을 떠올렸다가 이내 나이가 지긋하게 든 고모를 떠올렸다. 푸들 밥도 주고, 물도 갈아주고, 오줌도 똥도 누는 것을 본 고모가 돌아오는 것 같았다가 곧 아닌 것이 되었다. 모두가 떠나는 그 집으로 고모는 어김없이 돌아왔다. 딱 손가락 두 개 만큼의 시간이 지나면 고모는 내가 있는 곳으로 반드시 올 것이었다. 우리가 아직, 공존하고 있는 이곳에. (「공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