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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경제경영 > 기업/경영자 스토리 > 국내 기업/경영자
· ISBN : 9791194270058
· 쪽수 : 472쪽
· 출판일 : 2025-10-25
책 소개
목차
■ 서 문 5
제 1 부
1 철강산업 시대 10
2 박태준의 소년 시절 삶 17
3 박정희 혁명 사령관 비서실장 박태준 27
4 정부나 여당의 간섭은 안 됩니다 36
5 KISA발족 40
6 비행장을 짓는 것 아니오? 52
7 KISA의 차관 거절 56
8 일본 정부를 설득하다 64
9 닻(Anchor)을 올리다 75
10 박태준의 ‘하와이 구상’에 대한 부정론 82
11 박정희 대통령의 종이 마패 95
12 열연공정 건설 ‘비상 선언’ 104
13 박태준 자신이 포철 울타리가 되다 124
14 포항공대 출범 133
15 박태준, IBRD 자페와 만나다 147
16 각하께 불초 박태준 보고드립니다 158
제 2부
17 장부를 없애고 코드(Code)로 관리하라 174
18 조업 첫해에 흑자를 낸 포스코 193
19 길(吉) 수다니 신부(神父, Priest)님과 약속했던 그 진정성으로 212
20 우리 손으로 제철소의 DNA 설계 231
21 철이 없으면 주권을 지킬 수 없다 249
22 공장부지 만들기와 중앙도로의 사연들 270
23 KISA의 발족부터 기본협정까지 287
24 자금과 원료 확보 때문에 늘 긴장했던 나날들 301
25 “하루하루의 결과를 이튿날 아침까지 보고하시오” 310
26 인간한계에 도전했던 영일만 사람들 321
27 최소비용으로 최대공장 건설 337
28 중장비를 조작할 운전 기능공 태부족이 문제였다 355
29 일본을 능가하는 냉연공장을 만들자 374
30 포항제철 주요 설비 구매 비사 393
31 재무전산화 금기사항을 깬 포스코 409
32 100톤 전로 국산화에 성공하다 429
33 포항 3고로의 냉입사고와 싸우다 446
34 철강거인 박태준 겨울에 떠나다 461
저자소개
책속에서
철강산업 시대
현대 산업국가 완성은 철강산업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 철강산업은 경제 부국의 뿌리다. 21세기 경제 대국 대부분은 대량 철강 생산국이다.
1965년 초 어느 날 박정희 대통령은 박태준(朴泰俊) 대한중석 사장을 청와대로 불렀다.
“임자도 알다시피 나는 제철소 건설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최우선 사업으로 정하고 심혈을 기울여 왔어. 그런데 나라에 돈이 없는 데야 어쩌겠나. 외국이 우리를 믿지 못하겠다는 거야. 그래도 내 기필코 제철소를 건설하여 그들의 콧대를 꺾어놓고 말테야. 임자, 어디 좋은 생각 없나?”
박 대통령은 박 사장에게 하소연 겸 무슨 돌파구가 없는가 해서 말문을 열었다.
“각하 말씀대로 경제가 발전하려면 우리 손으로 철강을 만들어야 합니다.”
“맞아. 철강을 자급하지 않고서는 국가 경제를 바로 세울 수 없어.”
당시 한국 경제는 제1차 경제개발계획을 강력하게 추진한 결과 1962년 4%, 63년 9.3%, 64년 9%씩 성장했으며 1966년에는 11% 이상 성장할 것으로 전망됐다. 수출은 그 기간동안 3,200만 달러에서 2억 5,000만 달러로 급증했다. 모든 지표가 성장 가능성을 강력하게 시사해 주고 있었다. 반면 외환보유고는 바닥이 드러날 정도이고 물가 상승률도 매우 높았다. 향후 경제 발전은 확실해 보였다.
“각하, 기름과 철은 현대 산업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입니다. 기름(Oil)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철은 우리 손으로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가능할까? 국운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 모양이지. 일본은 세계대전에 패하고도 전후에 기적처럼 경제를 살려 내는데 말이야.”
“일본은 1868년 명치유신(明治維新)으로 과감하게 서구 문물을 받아들였습니다. 1880년대에 이미 근대적인 제철소를 세웠고 여기서 나온 철로 제조설비, 군수품과 무기를 만들어 부강한 산업 국가가 되었습니다.”
“배후에 어떤 인물이 있었기에 가능했을까?”
“전후 세워진 제철소로는 가와사키(川崎) 제철소가 으뜸입니다. 니시야마(西山) 야타로 사장의 집념이 그 제철소를 세웠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일본이 성공하게 됐는지 그들의 경험을 철저하게 연구하고 우리의 방안도 강구해야 돼. 임자가 일본통이니까 니시야마 사장을 우리나라로 불러올 수 없겠나?”
일본의 철강산업은 1950년 당시 연산 500만 톤으로 종전 수준을 회복하더니 1960년에는 2,200만 톤을 돌파하여 세계적인 철강 생산국이 되었다.
“각하, 니시야마 사장을 초청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보다도 우선 우리 제철소 건설 계획이 무산된 원인을 규명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봅니다.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면 해결 방안은 나올 것입니다.”
“바로 그거야.”
“철강 산업은 거액의 자본이 들어가기에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투자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종합제철소는 수많은 장비와 시설로 구성되므로 소규모로 건설해서는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우리처럼 힘없고 가난한 나라가 어떻게 그 많은 돈을 마련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규모를 줄일 수밖에 없지 않겠나?”
“하지만 각하, 먼 장래를 생각하고 대규모로 건설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장은 돈도 시간도 많이 들어 어렵겠지만 결국은 훨씬 경제적일 것입니다.”
“임자말이 옳아. 연구해서 이 일을 진척시킬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 보세. 그리고 니시야마 사장을 모셔 와서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지 한 번 알아보게. 나는 곧 미국을 순방할 계획이네. 거기서 제철소 몇 군데를 돌아보고 우리의 제철소 건설 계획에 대해 미 정부 관계자와 철강사 대표들과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네.”
당시는 박 대통령이 미국의 존슨 대통령 초청으로 국빈 방문을 앞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박태준의 심정도 대통령처럼 착잡했다. 그러나 결의는 한층 굳어졌다.
철강 외교 시작되다 - 박 대통령 피츠버그 방문
1965년 5월 박정희 대통령은 워싱턴을 방문했다. 국빈 방문이었다. 베트남 전쟁에 국군 2천 명을 파월키로 한 데 대한 보답이었다. 박 대통령은 이 기회에 제2차 5개년계획에 필요한 원조를 조기에 확정하고자 했다. 박 대통령은 필요하다면 추가 파병의 복안도 가지고 있었다. 월남 파병은 경제적인 목적 이외에도 한국전쟁 때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싸웠던 미군의 희생에 대한 보답의 의미도 있었고 공산 침략으로부터 자유 진영을 수호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장엄한 카퍼레이드 속에서 뉴욕 시민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은 박 대통령은 존슨 대통령으로부터 따뜻한 영접을 받았다. 미국에서의 박 대통령 이미지는 독재자가 아니라 목숨을 걸고 자유 진영을 지키는 수호자로 탈바꿈했다. 또한 미국 국민들로부터 부정부패를 청산하고 경제 건설에 열정을 쏟는 지도자로 인정받았다. 워싱턴 순방 외교로 박 대통령은 국제적인 인물로 인정받게 되고 국내에서도 그의 권위는 한층 높아졌다.
박 대통령은 방미 마지막 일정으로 피츠버그(Pittsburgh) 철강 공업지대를 방문했다. 피츠버그는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서부 도시로, 철강산업으로 엄청나게 발달한 도시다. 연간 1억 톤 이상을 생산하고 있는 세계 철강 공업의 메카다. 제철 산업의 꿈을 꾸고 있는 박 대통령의 이곳 방문은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박 대통령은 세계적인 철강 엔지니어링 업체인 코퍼스의 프레드 포이 회장을 만나 한국의 제철소 건설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극동의 빈국 대한민국이 세계 철강 시장에 명함을 내미는 순간이었다.
“대통령 각하, 종합제철소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 사업이므로 업계와 국제 금융기관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의견을 타진해 보겠습니다. 한 가지 알아두셔야 할 것은 50만 톤 규모나 되는 제철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국제적인 컨소시엄(Consortium)을 결정해야 합니다.”
컨소시엄은 공통의 목적을 위해 결성된 협회나 조합을 말한다.
포이 회장은 몇 가지 전제를 달며 국제 차관단(國際借款團)을 구성해보겠다고 말했다. 이에 고무된 박 대통령은 출국할 때보다도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귀국했다.
일본 니시야마(西山) 사장 방한
박정희 대통령은 귀국하자마자 박태준 사장을 불렀다.
“임자, 니시야마 사장을 어서 모셔 오도록 하게.”
박태준 사장은 다시 한번 야스오카 마사히로 선생을 찾아가 니시야마 사장의 방한을 성사시키는 데 필요한 조언을 구했다.
야스오카는 일본 양명학계의 거두로 그의 철학을 통해 일본의 전후 총리를 포함, 많은 사람에게 가르침을 준 사람이다. 젊어서부터 양명학(陽明學)으로 이름을 날린 야스오카는 47세 이전 1945년 무위 무관이면서 히로히토의 항복 선언 연설문에 손을 댔다. 현대판 왕사(王師)라 할 만했다.
야스오카의 사고의 3원칙이 있는데 첫째, 눈앞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지 말고 멀리 볼 것, 둘째, 하나의 측면에 집착하지 말고 여러 가지 관점에서 볼 것, 셋째, 사물은 지엽적으로 겉만 보지 말고 본질을 파악할 것이 그것이다.
양명학이란 중국 명나라의 학자인 왕수인(王守仁)이 세운 신유학의 학파로 기존의 주자학(朱子學)이 교조화로 변질되어 학문으로서제구실을 못 하게 되자, 유교의 본래 정신을 찾기 위해 유교를 새롭게 재해석한 것이다. 곧 양명학에서는 ‘자신의 마음이 곧 우주이며 우주의 일이 곧 자신의 마음’이라고 해석한다.
박태준 사장은 야스오카를 방문해 ‘니시야마 사장을 한국의 박 대통령이 만나기 원한다’고 하면서 니시야마 사장을 한국에 갈 수 있도록 설득해 달라고 간청했다.
1965년 6월, 박 대통령의 초청이 있은 지 3주 후 니시야마 사장이 서울에 도착했다.
“각하, 초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국의 경제 발전과 제철소 건설에 큰 뜻을 품고 계시는 각하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저로서는 커다란 영광입니다.”
그 자리에는 국무총리, 경제기획원 장관 등이 배석했다. 대화는 한국의 경제 발전과 종합제철소 건설 계획으로 모아졌다.
다음날 박태준 사장은 그 평가를 바탕으로 제철소 입지로 거론되어 왔던 인천, 울산, 포항 등 5개 지역으로 그를 안내했다. 니시야마 사장은 각 지역의 입지 타당성을 상세하게 평가하고 박태준 사장은 제철소 입지에 대한 지식과 안목을 쌓아갔다. 박 사장은 제철소 건설이 경제 발전에 절대 필요하다는 니시야마 사장의 신념에 전적으로 동감하면서 대통령의 집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중요한 점은 제철소 ‘규모(Scale)’에 관한 것이었다. 세계적 추세로 보아 100만 톤부터 시작하는 것이 경제성이 있다는 그의 말에 박태준 사장은 놀랐다. 당시 정부 관계자들은 100만 톤 규모는 꿈도 꾸지 못했다. 모든 사람들이 제철소의 생산 규모를 30만 톤에서 60만 톤 정도에 기준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내 제철소들은 5만 톤이나 10만 톤 수준이면 꽤 큰 제철소로 평가받고 있었다.
박태준 사장은 니시야마 사장의 평가를 바탕으로 보고서를 작성해 대통령에게 브리핑(Briefing)했다.
“박 사장, 대한중석(大韓重石)을 정상화해 흑자를 낸 사람은 임자뿐이야. 이제부터는 제철소를 건설하는 일로 나를 도와주게. 계획 단계부터 참여해서 차질 없이 진행되도록 하게. 나는 누가 뭐래도 임자의 뚝심과 능력을 알고 있지. 만성 적자에 허덕이던 회사를 1년 만에 순이익 12억 원의 회사로 만들어 놓은 사람이 바로 임자 아닌가? 골칫거리인 대한중석을 완전히 새로운 회사로 만들어 놓았으니 제철소 건설 프로젝트도 잘해 나갈 것으로 믿네.”
대한민국 제철산업 출발을 알리는 역사적 대화였다.
한국은 1965년 9월, 철강산업 조사단을 파견해 달라는 요청서를 일본 정부에 전달했다. 한국 정부는 국제부흥개발은행에 똑같은 내용의 과제를 의뢰했다. IBRD는 세계은행의 2가지 구성체 중 하나이다. 다른 하나는 IDA이다. IBRD는 1945년에 설립되었다. 그 당시 제2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된 국가들의 부흥이 목적이었지만 그 후 빈곤 퇴치 쪽으로 임무가 확장되었다. 한국은 종합제철소 꿈을 달성하는 첫 길목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박태준의 소년 시절 삶
(독자들이여, 우리는 종합제철 건설 프로젝트 이야기는 잠시 멈추고 그 주역인 박태준의 소년 시절의 삶을 잠시 들어가 보는 것도 포항제철 신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박태준은 1927년 음력 9월 19일 경남 기장군(현 부산시) 장안읍 임랑리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동해와 남해의 바닷물의 섞이면서 유명한 ‘기장 미역’을 키워내는 갯마을이다.
박태준이 태어날 때의 조선은 일제의 강점이 정점에 이르러 있는 때였다. 이 마을에도 일제의 상업자금이 손을 뻗쳐 어업권을 하나 둘 씩 사들였다. 어민들은 수백 년 동안 생업으로 지켜오던 어업권을 팔고 결국 고향을 하나 둘 떠나갔다. 박태준의 집안도 예외가 아니었다. 큰아버지가 먼저 일본으로 건너갔고 이후 박태준 일가도 큰아버지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박태준 6세 때의 일이다. 이때 아버지 박봉관 씨는 아타미(熱海)에 자리를 잡고 이즈반도 철도 부설 공사장에 터널을 뚫는 현장의 노동자로 일했다. 아타미는 일본 시즈오카현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인구 3만 명의 소도시로 온천으로 유명하다.
“아버지, 이런 옷을 입고 일해요?”
고사리손이 만지작거리는 ‘이런 옷’이란 거추장스러운 시커먼 ‘고무 옷’이었다.
“그래, 임마. 기찻굴을 뚫는데 그 안에서 온천수가 터져 나오니까 이런 옷을 입어야 한다고 정해져 있어.”
아버지의 거친 손이 귀여운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센징’이란 차별이 소년 박태준의 의식에 상처를 만들었다. 조센징은 일본에서 한민족을 비하할 때 쓰이는 욕설이다. 박태준은 그것을 극복하는 현실적 방법은 공부든 운동이든 일본 학생들에게 뒤지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했다. 중학교 2학년에 유도 2단에 오르는 그의 남다른 정열은 일본인 학생과 체력으로 겨뤄도 뒤지지 않아야 한다는 자신의 나침반에 순응한 결과였다. 그는 이따금 노래를 부르거나 하모니카를 불었다.
1945년 봄, 미군 폭격기 ‘삐상(B29)’들이 도쿄를 비롯한 일본 대도시를 폐허로 만드는 그때 박태준은 와세다대학교 기계공학과에 입학해 일단 징병을 모면했다. 그는 미군의 폭격을 피해 군마현 산골 마을로 옮겨 갔다. 그해 5월에는 히틀러가 베를린에서 자살하고 독일이 항복했다.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8월 9일 나가사키에도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8월 15일 일본이 항복했다. 박태준 가족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박태준도 귀향했다.
박태준은 모국어(母國語)부터 다시 익혀야 했으나 그는 자신이 알지 못하고 있는 몇 가지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수학과 과학 지식, 완벽하게 구사하는 일본어와 몸에 밴 일본 문화, 순수하게 간직한 민족의식, 건강하게 잘 지켜낸 몸, 만 18세 청년의 늠름한 기상이었다. 그의 내면에 고인 민족의식이 깨어나 해방 조국을 향한 애국심으로 전환된다면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 어느 자리에서건 매우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자산(資産)이었다.
건국(建國)에는 건군(建軍)이 있어야
고향에서 돌아온 박태준은 서울로 올라와 학업(學業)을 모색했다. 취직자리도 알아보았다. 그러나 해방을 맞아 이념 대립과 정치적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진 신생 독립국은 그에게 길을 안내하지 못했다. 신탁통치 찬반 분쟁에 이어 남북(南北)의 분단(分斷)이 확정된다. 박태준은 혼자서 도쿄로 돌아갔다. 히비야 공원(日比谷 公園)은 그대로 있었다.
히비야 공원은 1903년 문을 연 일본 최초의 서양식 공원으로 봉건시대 막강한 다이묘의 번저가 있었던 곳이다. 이곳은 박태준이 패망 직전 양명학 대가로 알려진 야스오카(安岡正篤)의 강연을 귀담아들었던 곳이기도 했다. 그는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자질은 사심(私心)을 버리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 말은 청년 박태준의 머리에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패망의 도쿄 역시 혼란의 도가니였다. 그는 와세다대학 학업을 포기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무엇을 할 것인가? 박태준은 갈림길에서 헤맸다. 긴 고민 끝에 군인(軍人)의 길을 택했다. 박태준의 이 선택은 그 자신에게도, 신생 조국에게도 커다란 행운을 가져다주게 된다. 창군에 바쁜 조국은 장교 확보가 시급했고 단기 과정 장교를 육성하는 육군사관학교에 박태준은 입교했다. 그는 육군사관학교 강의실에서 그의 인생 30대 후반부터 20여 년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박정희(朴正熙) 교관과 처음 만나게 되며 졸업 후 소위로 임관돼 38선 포천에서 중대장으로 근무하는 중 6.25 전쟁과 맞닥뜨린다.
박태준은 어느 날 “아버지, 군인이 되기로 했습니다. 국방 경비대에 입대하겠습니다.” 맏이가 불쑥 내놓은 뜻밖의 선언에 아버지는 못마땅한 반응부터 보였다.
“대학까지 공부했는데 군인이 되겠다는 거냐?”
“건국에는 반드시 건군(建軍)이 있어야 합니다. 훈련만 받으면 사관학교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니 우선 그렇게 시작하겠습니다. 무슨 일이든 조국에서 뜻깊은 일을 하고 싶습니다.”
6.25 전쟁 발발 3일째 저녁, 박태준 중대는 비 내리는 미아리 고개 일대에 진을 쳤다. 이미 중대장 12명 중 10명이 전사했다. 적의 소련제 탱크에 속수무책 당하는 후퇴와 죽음의 시간이었다. 그는 거기서 죽을 각오였다. 그러나 전령이 와서 남은 병력은 한강을 건너라고 했다. 박태준은 운 좋게 살아남았다. 그리고 후퇴의 연속이었다. 포항 형산강까지 밀렸다.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했다. 이번에는 북한 인민군대가 후퇴할 차례였다. 박태준은 북진을 거듭해 원산, 흥남, 청진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중공군(中共軍)이 두만강, 압록강을 건넜다. 44만 병력이었다. 흥남 철수, 1·4 후퇴, 38선을 울퉁불퉁한 곡선으로 대체한 전쟁이 계속되었다.
1953년 7월 29일 휴전 협정 체결, 중령 계급장의 박태준은 멀쩡하게 살아남았다. 가슴에는 무공훈장 세 개가 달려 있었다. 그것은 ‘폐허의 시대’에 살아남은 자들에게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제대로 일을 해달라고 요구하는 채권증서 같았다. 만약 청년 장교 시절에 운이 나빴다면 일찌감치 그의 인생은 순국의 비석에 이름 석 자를 새기면서 종지부를 찍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산업화 시대의 대한민국은 세계 철강 산업사(史)에서 전무후무한 불후의 금자탑을 남기는 ‘불세출의 일꾼’을 잃었을 것이다. 그는 좌우명을 결정했다. ‘짧은 인생을 영원 조국에’, ‘절대적 절망은 없다’.
맞선으로 결혼
휴전 직후 지리산은 한국정부에게 ‘공비(共匪)의 산’으로 토벌의 대상이었다. 공비란 공산 비적의 준말로 무장을 하고 떼를 지어 다니면서 사람들을 해치는 공산주의자 도적을 말한다.
박태준 중령은 5사단 병력을 지리산으로 이동하고 배치하는 극비 작전을 완벽하게 수립하고 전공을 세웠다. 군단장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연대장으로 나갈 기회를 맞았다. 그러나 그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고 그간 텅 빈 머리를 채우기 위해 1953년 11월 육군대학에 입교했다.
이듬해 6월 수석으로 졸업하여 대통령상을 받고 금시계를 기념품으로 받아 손목에 찼다. 육군사관학교 교무처장으로 부임했다. 당시 육사 교장 박병권 장군은 신병 훈련소의 박태준이 육사에 들어갈 수 있도록 추천해 준 선배이기도 했다. 전쟁 중 진해로 남하했던 육사를 다시 서울 태릉으로 옮겨오는 작전을 훌륭하게 완수했다.
1954년 12월 만 27세의 박태준 중령은 마침내 고향의 어머니의 주선으로 아내를 맞이하게 되었다. 신부는 이화여대를 졸업한 만 23세의 부산 아가씨 장옥자 양, 청년 장교와 갓 대학을 나온 처녀는 틈틈이 전광석화와 같은 만남을 가졌다. 당시는 은밀하게 젊은 연인들이 만나는 것이 트렌드였다. 두 남녀는 화톳불을 가운데 놓고 대화를 나눴다.
“육사에는 생도가 몇 명이나 되는가요?”
처녀는 오랜 시간 생각 끝에 찾아낸 질문이었다.
“그건 군사 기밀이어서 알려줄 수 없습니다.”
연인의 대답은 아니었다. 공사(公私)가 뚜렷한 청년 장교 그대로였다. 1955년 봄날 신랑은 대령으로 진급했다.
참모장 부임과 가짜 고춧가루 사건
1956년 1월 박태준 대령은 국방 대학원에 입교한다. 영국은 1927년, 미국은 1946년에 각각 국방 대학원을 설립했다. 한국은 1955년에 설립했다. 국방대학교는 국방에 필요한 병기, 장비 및 물자의 조사, 연구, 개발, 시험 등을 담당하는 연구기관이다. 주요 동문으로는 정항래, 채명신, 정승화, 곽상훈, 송영무, 박희도, 정호용, 이진삼, 공정식, 정래혁, 박명철, 조성태 등이 있다. 이 대학원에서는 전쟁은 군인의 전유물이 아닌 모든 국민의 문제로서 국가의 총력으로 수행된다는 개념하에 경험과 이론에 의거해 고위 장교들을 재교육시키고 군대 지휘를 국가 경영의 차원에서 공부한다.
박태준, 장옥자 부부는 머리맡의 자리끼에 살얼음이 끼는 단칸 셋방에서 걸음마도 못 해보고 숨을 멈춘 첫딸을 가슴에 묻는 아픔을 겪게 된다. 국방대학원을 졸업한 박태준은 국방대학 교수로 근무하던 중 1956년 11월 국방장관의 부름을 받아 국방부 인사과장으로 부임한다. 요직이었다. 부패가 전횡을 부리는 시대 국방부 인사과장 자리는 온갖 청탁이 드나드는 출입구와 다름없었다.
부패는 국방 분야에도 깊숙이 박혀 있었다. 뒷구멍을 몰래 열어 두기만 하면 마치 부엌의 음식을 훔쳐 나르는 영특한 쥐를 키우는 것처럼 청탁의 재물을 소복소복 쌓을 수 있는 요직이었다. 그러나 그따위 뒷거래를 경멸할 뿐 아니라 박멸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박태준에게는 그것은 무엇보다 자신과의 투쟁을 요구했다. 셋방살이 처지를 유혹하는 부정한 돈에 넘어가지 않기, 부당한 압력과 청탁에 굴복하지 않기, 이는 바로 자기 자신과의 가혹하고 치열한 투쟁이었다. 딸깍발이(가난한 선비) 장교 박태준은 부패의 늪 위에 자신이 만든 외나무다리를 놓았다. 그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그의 모습이 타인의 눈에는 아슬아슬해 보였는지 몰라도 스스로는 언제나 당당한 걸음걸이였다.
야 이 새끼야! 쏘아 죽이기 전에 당장 꺼져
딸깍발이 장교 박태준이 남긴 유명한 일화는 1957년 11월 25사단 참모장 때의 ‘가짜 고춧가루’ 사건이다. 사단 참모장으로 부임한 박태준 대령의 첫 번째 큰일은 사단장병의 월동(越冬) 준비에 매우 중요한 김장 과정에서 일어났다. 당시 다른 부식이 없는 군부대에서 김치를 공급하는 김장은 군의 사기와 관계되는 매우 민감한 것이었다.
박태준 대령이 참모장으로 부임했을 때는 각종 김장 재료들이 납품돼 김장이 막 진행되고 있었다. 그는 김장을 담그는 현장에 나가 보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고춧가루 자루에서 전혀 매운 냄새가 나지 않았다. 동행한 병참 장교에게 “고춧가루 자루 하나 가져오고 물 한 양동이 떠와 봐.”라고 지시했다. 갑자기 분위기가 살벌하게 바뀌었다.
“고춧가루 부어봐.”
순식간에 말간 맹물이 뻘겋게 물들어 버렸다. 박 대령은 소매를 걷고 양동이에 팔을 넣었다. 그의 손에 잡혀 올라온 것은 톱밥 같은 물질이었다.
“이런 걸 병사들에게 먹여! 이런 개돼지 같은 새끼들. 적이고 반역자야.”
그가 손에 잡혀 있는 톱밥을 병참 장교의 가슴과 얼굴에 뿌렸다. 양동이를 그의 머리에 뒤집어씌웠다. 박 대령은 오른발 왼발을 번갈아 몇 차례 움직였다. 당시 사회에서는 고춧가루뿐만 아니라 가짜 참기름 등 각종 음식과 재료들이 가짜로 뒤범벅인 상태였다. 이승만 정권 말기의 사회적 병폐의 단면이었다.
박태준 대령은 울화통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본때를 보이자면 당장에 줄줄이 불러들여 가짜 고춧가루를 한 줌씩 입에다 집어넣고 싶었다. 하지만 박 대령은 신속하게 사후 처리에 착수했다.
“가짜 고춧가루가 얼마나 되는지 확인하라. 납품업자의 신상을 들고 오라. 병참 계통의 관계자들을 조사하라.”
재고 물량부터 파악했다. 김장용을 빼더라도 70포대 정도가 남아 있다는 보고였다. 납품업자의 신상 보고도 올라왔다. 보나 마나 인맥이 줄줄이 엮여 있을 것이다. 박태준 대령은 ‘가짜 고춧가루’ 사건을 사단장에게 보고했다. 사단장의 반응이 밋밋했다. 뭐 그만한 일로 흥분하느냐고 은근히 책망하는 듯한 감이 느껴졌다. 적당히 넘어가는 것이 누이 좋고 매부 좋다라는 암시 같았다.
박 대령은 만만한 길을 아니겠군. 그는 야무지게 입술을 깨물었다. 30분쯤 지나자 더 높은 상부의 전화가 걸려왔다. 납품업자를 교체하지 말고 앞으로 진짜 고춧가루를 납품하겠다는 선에서 타협하고 마무리하라는 압력이었다.
그날 저녁이었다. 박태준의 숙소로 낯선 사내가 방문했다. 문제의 납품업자였다. 납품업자의 입가에 미소가 피었다.
“참모장님, 다 저의 잘못입니다. 앞으로는 절대 그런 일이 없도록 약속하겠습니다. 한 번만 봐주십시오. 이번에 참모장님이 저의 뒤를 봐주시면 저는 두고두고 참모장님의 뒤를 봐 드리겠습니다. 이게 다 세상 사는 이치 아니겠습니까?”
매끄러운 하소연을 마친 사내가 오른손을 호주머니에 넣더니 봉투를 꺼냈다. 박태준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오른손에 권총을 잡았다.
“야 이 새끼야! 그 더러운 돈 가지고 당장 꺼져. 쏘아죽이기 전에. 다시는 우리 부대 근처에 얼쩡거리지도 마!”
사내가 부리나케 봉투를 들고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줄행랑을 쳤다.
사건이 터지고 사나흘 뒤였다. 트럭 한 대가 연병장으로 들어서자 휴식을 취하고 있던 병사들이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코를 찌르는 매콤한 고춧가루 냄새가 연병장을 채웠다. 만연한 비리와 부패가 판치는 병영에서 웃어넘기기에는 너무 심각한 사건이었다.
박정희 장군의 인사 참모 제의
1960년 1월 하순 어느 날 육군 본부 인사 처리 과장 박태준 대령의 어깨를 툭 치는 손이 있었다. 박정희 장군이었다.
“박 대령, 이번에 내가 부산 군수기지 사령부 사령관으로 발령받았네. 나와 함께 사령부 인사 참모로 가세.”
“알겠습니다. 영광입니다.”
그때부터 거사를 꿈꾸고 있던 박 장군은 유능하면서도 신뢰할 수 있는 인재들을 모으고 있는 중이었다.
박정희 사령관의 인사 참모인 박태준은 부산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와 자유당 독재 정권의 붕괴로 이어지는 4·19 혁명을 보았고 계엄 상황에서 부산시청 통제관으로 나가 당시 한국 행정의 낙후성과 부패의 단면을 확인했다. 그리고 장면(張勉) 정부의 국방부가 부산 군수 기지 사령부의 동태를 수상쩍게 여겨 1960년 7월 박정희 사령관을 광주 쪽으로 전임시키고 박태준 대령은 8월 하순부터 4개월 일정으로 미국 육군 부관학교로 연수를 보냈다.
1961년 새해 귀국한 박 대령은 육군본부 경력 관리 기구 위원으로 발령받았다. 강대한 부자 나라의 ‘육군 부관학교’에서 박태준은 최신 행정 이론과 관리 제도를 중점적으로 배웠다.
1961년 1월 귀국하는 그의 가방에는 ‘금속제 모형 선박’이 들어있었다. 아내를 위한 선물이었다. 그가 왜 모형 선박을 선물로 정했는지는 의문이다. 미제 화장품을 기대하고 있던 아내는 시무룩했다. 그나마 그 선물은 공돈으로 산 것이었다. 미국 안내자가 한반도의 촌놈들에게 주눅을 먹이려고 돌아오는 길에 데려간 라스베이거스 그 도박의 요지경에서 박태준은 빙고에 덤벼 잭팟으로 단번에 먹은 돈으로 선물을 마련한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