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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경제경영 > 기업/경영자 스토리 > 국내 기업/경영자
· ISBN : 9791194270034
· 쪽수 : 492쪽
· 출판일 : 2025-03-15
책 소개
목차
서문 7
제 1 부
1. ‘국적기(國籍機)를 타고 해외에 나가는 것이 소망이요’ 15
2. 기계를 뜯어봐야 직성이 풀려 21
3. 일본 조선소의 책벌레 소년 25
4. 넓은 세상을 본 조중훈 30
5. 엔진(Engine) 재생업 이연(理硏)공업사 35
6. 한진(韓進)상사 출범 39
7. 미군 군수(軍需) 물자 수송으로 달러를 벌어라 47
8. 미8군 사령관에게 편지(Letter)를 띄우다 54
9. 신도로(新道路)를 양보하고 구도로(舊道路)로 60
10. 베트남 군납조합 이사장을 맡아 주시오 64
11. 숨막히는 「100일」의 약속 70
12. 베트남의 마음을 사다 78
13. 한진(韓進) 성장 엔진을 달다 83
14. 일생일대의 도전 대한항공(KAL) 인수 90
15. 대한항공(KAL) 본격적으로 날개를 펴다 98
16. 화물기(Cargo Plane) 태평양을 날다 106
17. 점보기(Jumbo 機)를 띄운 승부수 112
18. IBM의 까다로운 고객 119
19. 에어버스 세 번째 구매자 KAL 123
20. 폭우가 쏟아지면 구름 위로 올라가라 130
21. 뉴욕 취항과 2차 오일쇼크 위기 137
22. 중국(中國) 민항기 불시착의 행운 143
23. 박정희 대통령, “조 사장, 전투기를 만들어주시오.” 151
24. 한진해운(海運) 설립 159
25. 중동-북미 컨테이너선 황금 해로(海路) 개척 . 164
26. 해운사를 항공사 경영기법에 접목 171
27. 힘겨운 ‘대한선주’ 인수 176
28. 정부를 대신해 지은 인천 제2 도크 182
29. 건설업 분야 진출 188
30. 조선(造船) 분야 진입 193
31. LNG선 설계도를 얻다. 199
32. 조중훈의 제동목장(牧場) 203
33. 민간 외교가 조중훈 (일본 재정 차관 2천만 달러 성사) 214
34. 엘리제 궁도 움직이는 콩파뇽 219
35. 바덴바덴 기적의 숨은 주역 (88서울올림픽 유치전) 224
36. “대한항공 여객기가 중국 영공을 통과하게 해주오.” 231
37. “인하대(仁荷大)를 맡아 키워 주시오.” 239
38.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를 수 있는 터면 돌산도 좋다 245
39. ‘항공대(航空大)를 인수해 주시오’ 249
40. 조종사 용광로 ‘기초 비행 훈련원’ 256
41. 여러분은 오늘부터 4년제 대학 졸업생입니다 260
42. 정석(靜石) 조중훈 회장의 진면목(眞面目) 268
43. 상대의 마음을 얻는 리더(Leader) 280
44. 붓다(Buddha)의 마음으로 덕을 쌓다 287
제 2 부
45. 조양호 사장 취임과 경영 혁신 295
46. ‘항공 여행의 꽃’ 기내식(機內食) 사업 확충 301
47. 보유 항공기 100대 돌파와 정비 능력 구축 306
48. 세계 초유의 ‘항공기지’ 탄생 313
49. 괌(Guam) 사고(事故)와 안전 운항 체제 구축 318
50. 외환위기(IMF 사태)와 대한항공 위기 극복 326
51. 통제센터(Operation Control Center, OCC) 개원 332
52. 뉴 CI 도입과 신 유니폼 339
53. 사회적 책임 경영 전개 345
54. 인터넷 항공권(E-航空券) 구매 시대 전개 351
55. 미(美) 항공 자유화(Open Sky)와 아시아 노선망 강화 358
56. 항공화물(Air Cargo) 세계 제패 366
57. 신 성장 동력을 위한 새로운 사업 영역 개척 374
58. 저비용(LCC) 진에어(Jin Air) 출범 381
59. 위기에 빛난 조양호 리더쉽 386
60. 화물 사업(Air Cargo) 세계 1위의 시련 393
61. 세계 항공사 최초 ERP 시스템 구축 400
62. 항공 동맹체(Air Alliance)에 가입이 아니라 창설해야 410
63. LA에 윌셔 그랜드(Wilshire Grand) 호텔을 짓다 417
64.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위원장 조양호 425
65. 항공 전문가 오너(Owner) 조양호 434
66. 18년간 국제항공운송협회 집행-전략정책위원 대활약 443
67. 네 사람의 멘토(Mentor)와 지식 만찬(晩餐, Dinner) 452
68. 조종사(Pilot) 라이선스를 획득한 조양호 461
69. 일본항공(JAL)보다 잘 만든 매뉴얼 470
70. 스포츠(Sports)는 우리를 하나로 만드는 힘을 가졌다 476
71. 조양호 회장의 영면(永眠) 488
저자소개
책속에서
‘국적기(國籍機)를 타고
해외에 나가는 것이 소망이요’
조중훈 사장은 1968년 하반기 어느 날 청와대로부터 박정희 대통령이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 조중훈 사장은 박 대통령이 무엇 때문에 자신을 찾고 있는지를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최근 몇 달 동안 여당 실세인 김성곤 공화당 재무위원장,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이후락 대통령 비서실장이 찾아와 박 대통령의 뜻이라며 대한항공공사를 조 사장의 한진그룹이 인수해 줄 것을 요청해 왔기 때문이었다.
대한항공공사의 역사는 꽤나 길고 험난하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3월 1일 대한국민항공사(Korean Airline Co., Ltd.)로 설립되었으며 1962년 3월 26일 대한항공공사로 개명했다. 우리나라 민항(民航) 개척자였던 신용욱의 대한국민항공사가 경영난으로 막을 내리고 1962년 3월 14일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박정희)에서 의결되고 3월 23일 제정 공포된 대한항공 사업법(법률 제1040호)과 4월 26일 제정 공포된 동법 시행령에 의하여 1962년 6월 15일 창립총회가 개최되고 6월 19일에 등기를 마침으로써 대한항공공사(Korea Airline Co., Ltd.)가 설립되었다. 정부가 국영 항공사인 대한항공공사를 설립한 것은 경영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도산 직전 상태에서 허덕이는 대한국민항공사를 흡수하고 우리나라 민항 사업의 급속하고도 영구적인 발전을 위해서였다.
당초 계획은 항공 사업 성격상 서독의 루프트한자, 일본항공(JAL), 스칸디나비아항공, 에어프랑스, 팬암항공(Pan American Airway) 등 세계 주요 항공사의 장점을 살려서 정부 50, 민간 50의 투자 비율로 관(官), 민(民) 공영을 계획했으나 민간 항공사 자본의 취약성으로 100% 정부 출자의 국영 공사를 설립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대항항공공사는 발족 초기의 구상과는 달리 국제선 취항 부재 상태로 1962년 10월 26일 주식 전부를 한국증권거래소에 상장하려 했으나 인기를 얻지 못하고 상장에 실패했다. 당시 우리나라 경제 상황은 불모지인 항공 산업보다는 금융, 섬유 등 성장성이 보장되는 산업이 인기를 끌고 있었다.
대한항공공사는 1952년, 1953년에 대한국민항공사에서 도입한 DC-3 항공기 12대, DC-4 항공기 1대를 정부로부터 불하받아 일본에서 대대적인 정비·수리를 하고 1963년 10월 3일 국내선에 취항했다. 아울러 1962년 12월 2일 한국인 기장 8명으로 6개국 내 정기 항공 노선 조정간을 잡게 함으로써 외국인 기장 없이 자주적인 운항을 개시했으나 중형기 1대 값에 불과한 자본금으로 발족하였던 대한항공공사는 항공기 절대량 부족, 노후 기종의 대체 불능, 정비 기술과 시설 미비 등으로 경영상의 결함을 안고 있었다.
이때 이미 노스웨스트(Northwest), 중국민항공사 등은 DC-8, 콘베어 880 등 제트 여객기를 운항하고 있어 이들과 경쟁의 여지가 없는 열위에 있었다. 이로인해 대한항공공사가 적자를 무릅쓰고 8년간 지켜왔던 동남아 노선(서울-홍공-대만) 재취항은 5년 반이 지난 1967년 6월 1일 이루어졌다.
대한항공공사는 한·일 국교 정상화 기본 조약 조인 1년 7개월 전인 1963년 12월 28일 일본항공(JAL)과 상무협정을 맺고 다음 해 1964년 2월 28일 정부 승인과 함께 한일 정기 항공 노선을 개설했으며 1964년 3월 17일 오전 10시 20분 F-27 항공기로 여의도 비행장에서 서울-오사카 한일노선을 취항하는 성과를 올렸다. 우리나라 민항사(史)에 한 획을 긋는 역사적인 일이었다. 그 후 1965년 9월 1일 부산-후쿠오카, 1968년 7월 25일 황금노선인 서울-동경 노선을 취항했다.
한편 대한항공공사는 네덜란드 포커사의 F-27 항공기 2대를 1964년 1~2월에 도입하였고 4, 5월에는 미국 유니버셜항공으로부터 FC-27 항공기 2대를 추가로 도입했다. 또한, 정부는 1967년 7월 6일 미국 수출입은행 차관으로 맥도널드 더글러스 사 DC-9 항공기 도입을 승인해 이 항공기가 1969년 7월 23일 김포국제공항에 첫 착륙함으로써 우리나라 민항사상 최초의 제트 여객기 시대를 개막하였다.
이후 제트 여객기로 8월 14일 서울-대만-홍콩 노선에, 8월 19일에는 서울-오사카 노선에 취항했다. 그러나 DC-9 제트 여객기가 국제선에 취항한 지 한 달이 안 된 9월 1일 오사카공항 이륙 직후 엔진 고장으로 비상착륙 하는 사고로 서울-동경 노선 개설이 무기 연기되는 등 동남아 노선도 휴항에 들어가 1970년 3월 DC-9이 재등장하기까지 6개월 동안 모든 국제선은 외국 항공사에 의해 독점 운항되어 대한항공공사의 경영은 날로 악화되었다.
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공적인 수행으로 국가 경제 발전과 더불어 민간 자본도 크게 성장하여 항공 산업을 민간에게 불하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1968년 대한항공공사를 민간에게 불하하기로 결정했다. 문제는 민간 누구에게 항공 산업을 맡기느냐였다.
조중훈 사장, 박정희 대통령과 면담
조중훈 사장은 청와대로 박 대통령을 찾아갔다. 박 대통령이 무슨 말을 할지 대강은 알고 갔지만 긴장되었다.
대한항공공사는 당시 22개 국영 기업체 중에 가장 경영 내용이 부실했다. 누적적자도 컸으며 매년 적자 폭도 커져갔다. 항공기 기계 고장으로 결항과 연발착이 빈번해 국민들의 신뢰도도 바닥 수준이었다. 조 사장은 청와대에 가면서도 대통령의 인수 제안을 거절할 생각이었다.
“조 사장, 어서 오십시오.”
박 대통령은 특유의 부드러운 음성으로 인사말을 건넸다.
박 대통령은 그의 강직한 인상과는 달리 아주 부드럽고 따뜻한 음성을 가졌다.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회장이 부정 축재자 신분으로 박 대통령과 처음 면담할 때 그의 음성을 듣고는 안도감을 가졌다고 그의 회고록에서 밝혔다. 조중훈 사장도 긴장을 했지만 편안한 마음으로 대통령과 대화를 시작했다.
“조 사장님. 바쁜 시간을 내주어 감사합니다. 오늘 조 사장님을 만나자고 한 것은 우리나라 경제 발전에 꼭 필요한 항공 산업에 대해 논의하고자 해서입니다. 조 사장님도 아시는 바와 같이 대한항공공사는 더 이상 우리나라 항공 산업을 이끌고 갈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항공공사를 국영 체제에서 민영체제로 전환시켜 민간 기업에서 이끌어가도록 정부에서는 결정했습니다. 조 사장님이 이끄는 ‘한진그룹’은 운송이 주력 기업이고 운송에 대한 노하우를 가지고 계실 테니까 항공공사를 인수하셨으면 합니다.”라고 박 대통령은 말문을 열었다.
“그런 중요한 국가 기간산업을 저희 그룹에 맡기시겠다는 말씀은 대단히 영광스럽고 감사합니다. 그러나 저희 그룹은 항공공사를 맡기에는 힘이 부족한 수준입니다. 특히 저희 그룹이 육운이나 해운에는 약간의 우위를 가지고 있습니다만은 항공 산업 분야는 경쟁력이 전무한 편입니다.”라고 조 사장은 정중하게 대응했다.
“조 사장님의 한진그룹은 항공 산업 분야에서도 얼마 지나지 않아 강한 경쟁력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동안 조 사장님의 경영 수완과 능력을 본 바 나는 그렇게 결론 내고 있습니다.”
“과분한 칭찬이십니다. 만일 저희 한진이 힘이 없으면서도 중요한 국가 기간산업을 맡아 성공하지 못한다면 국가에 큰 손실을 가져올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박 대통령은 조 사장의 거듭된 사양 의사에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박 대통령은 마침내
“조 사장님! 나는 국적기(國籍機)를 타고 해외에 나가 보는 게 나의 소망입니다.”라고 토로했다. 일국의 대통령으로서 흔히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박 대통령의 국적기에 대한 애착은 남다른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4년 12월 6일, 대한민국 국가 원수로서는 처음으로 하인리히 뤼브케 서독(西獨, 통독 이전) 대통령 초청으로 국빈 방문했다. 그 방문은 한국으로서는 대단히 중요한 행사였다. 경제개발 계획 수행에 부족한 외자를 조달하기 위한 일종의 경제 외교 행사였다.
대한민국은 당시 세계 제일의 달러 보유국인 서독에서 2천만 달러 차관을 획득해 올 계획이었다. 2천만 달러는 대한민국의 경제개발 1차 5개년 계획이 실패하느냐 성공하느냐를 가를 수 있는 큰 돈이었다.
그런데 서울에서 서독 쾰른공항까지 가는 것이 문제였다. 한국은 그곳까지 날아갈 수 있는 국적기를 갖지 못하고 있었다. 국적기란 일국에 소속된 항공기를 말한다. 독일에서는 한국 대통령의 그런 사정을 알고 독일 국적기 루프트한자 649호기를 내주었다. 박 대통령은 루프트한자 기를 타고 가면서 국적기를 갖지 못한 처지를 비참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박 대통령이 조 사장에게 ‘국적기를 타고 해외에 나가 보는 게 소원’이라는 심정을 토로한 것은 그런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다.
조중훈 사장은 대통령의 이 말을 듣고는 더 이상 반론을 할 수 없었다. 흔히 ‘사업보국’이라는 말이 있는데 대사업가들이 사업 규모가 일정 수준을 넘어 국가 사회에 책임을 느끼게 되면 그 사업가는 공인으로 존경받게 된다. 조중훈 사장도 박 대통령의 말을 들으면서 공인의 입장이 되어 대통령의 말을 외면할 수 없었다. 조중훈 사장은 박정희 대통령게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청와대를 나섰다.
기계를 뜯어봐야 직성이 풀려
조중훈은 일제 강점기인 1920년 2월 11일(음력)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에서 아버지 조명희 선생과 어머니 태천즙 여사의 4남 4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20년대는 일제가 조선을 집어삼킨 지 10년째로 3.1 독립만세운동이 반도 전체를 휩쓴 이듬해였다. 10대째 서울 토박이로 살아온 전형적인 서울 사람이었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전답이 있어 소문난 큰 부자는 아니지만 형편이 넉넉한 편이었다.
조중훈은 어릴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하고 과학과 수학 과목에서 재능을 발휘했다. 한 가지 공작(工作, )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손에 잡히는 기계란 기계는 무엇이든 뜯어 봐야 직성이 풀렸다.
여덟 살이던 어느 날 조중훈은 집에서 어머니 태천즙 여사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졸라댔다. 어머니가 재봉틀 바느질을 하고 계시는 그 재봉틀을 뜯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당시 재봉틀은 한 집의 가보적 존재였다. 재봉(裁縫)틀은 천, 가죽, 종이, 비닐 등을 실(Thread)로 바느질을 하는 데 사용하는 기계다. ‘미싱’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영어의 소잉머신(Sewing Machine)이 일본에 전해지면서 뒷부분 ‘머신’이 변화된 것이다.
어머니는 귀한 재봉틀이 못 쓰게 될까 봐 보채는 아들을 나무랐지만, 아들은 포기하지 않고 종일 졸라댔다. 어머니는 하는 수 없이 허락했고 아이는 고사리 손으로 드라이버를 움켜쥐더니 부품을 하나하나 뜯어내 분해하기 시작했다. 해체된 부속품들은 마룻바닥에 놓여졌다. 어머니는 재봉틀을 버리게 되었다며 체념하고,
“중훈아! 다시는 집안 물건에 손대지 말거라.”고 타일렀다.
그러는 순간 아이는 이마에 송송 맺힌 땀을 기름 묻은 손으로 훔치더니 널려있는 부품을 하나하나 집어들고 해체하던 역순으로 조립하기 시작했다. 아이는 신통하게 재봉틀을 완벽하게 만들어냈다.
“아니, 중훈이가 재봉틀을 완전히 뜯어내 분해하더니 이렇게 멀쩡하게 다시 만들어 냈네요!”
어머니는 아버지와 가족들을 불러 신기해하면서 아들의 공작 재능에 감탄했다.
조중훈의 기계를 뜯어보고 싶어 하는 호기심은 성년이 되어서도 여전했다. 해방 이후 ‘한진상사’를 창업한 이후에도 기계에 얽힌 일화가 많다. 당시 조중훈은 ‘할리 데이비슨’을 타고 집이 있는 서울에서 회사가 있는 인천을 오갔는데 한 번은 금강산에 다녀오는 길에 엔진이 고장 나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시골 마을이라 오토바이를 수리할 곳은 없었다. 낭패였다. 조중훈의 기계를 고치는 천재성은 여기에서도 발휘되었다. 동네를 샅샅이 뒤져보았다. 그러다 어느 집 처마에 걸려있는 질긴 빨랫줄이 눈에 띄었다. 조중훈은 집주인의 양해를 구하고 그것을 꼬고 엮어 엔진 실린더가 새는 것을 막았더니 시동이 걸리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조중훈의 기계를 다루고 고치는 천재성은 훗날 수송 사업을 할 때도 빛을 발휘했다. 트럭 엔진 소리만 들어도 몇 번째 실린더에 문제가 있는지 알아맞힐 정도였다. 정비사가 혹시나 하고 뜯어 보면 틀림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남달랐던 조중훈의 기계에 대한 재능은 아버지 조명희 선생에게는 칭찬 거리가 못 되었다. 학문에 열중하고 사색을 즐기는 장남과는 달리 기계 만지는 것을 좋아하는 둘째 아들이 탐탁지 않았다. 아버지는 둘째도 학문에 열중하고 기계보다는 공부로 출세하기를 바랐다. 뚝딱뚝딱 뜯고 고치며 집안 곳곳을 어질러 놓는 둘째 아들이 걱정스러웠다.
아버지는 지나치게 동(動)한 것을 경계하고 정()한 성품을 더해 동과 정이 조화를 이루는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정석()’이란 아호를 지어 주었다. 하지만 어린 정석은 정석으로 살아가기에는 너무나도 동적이었다. 꿈과 모험심은 끊임없이 그의 가슴 속에서 꿈틀댔다. 조중훈의 이런 동적 에너지는 한국의 경제 성장사(史)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대기업 그룹이 만들어지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휘문(徽文)고보 중퇴
조중훈은 서울 미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휘문고보(현 휘문고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조중훈은 가정 형편으로 휘문고보 3년 중퇴하고 진해(鎭海)의 해원양성소(현 국립 해양대학 전신)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후지무라 조선소에 입사했다. 조중훈이 휘문고보에 진학해 그가 추후 대한항공(KAL)을 일으켜 세계적 항공인이 되었지만 휘문고보 출신에는 또 하나의 우리 항공사에 빛나는 인물인 안창남(安昌男, 1900.3 ~1930.4) 비행사가 있다. 안창남도 서울 미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휘문고를 다니다 중퇴하고 일본 오쿠라(小粟) 비행학교에 유학, 한국인 최초의 비행사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떴다 봐라 안창남’이라는 속언이 있을 정도로 전설적인 항공인이었다.
안창남은 열세 살(1913년) 때 조선 하늘을 최초로 비행하는 비행기를 목격했다. 안창남은 다른 아이들처럼 비행기에 압도당하지 않고 “그까짓 것 우리 조선 사람도 할 수 있지!”라고 승부욕을 드러냈다.
그 후 조선 13도(道)가 일목요연하게 그려진 금강호를 타고 조선 하늘에 날아와 민족의 자긍심을 높여주었다.
일본 조선소의 책벌레 소년
부족할 것 없었던 집안은 조중훈이 휘문고보 3학년이던 1930년대 중반, 아버지가 사업을 시작하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대대로 물려받은 전답을 팔아 종로2가에 대형 포목점을 차렸다. 토지 자본을 상업 자본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일제(日帝)의 상업 자본이 침투해 돈이 생기는 사업 분야는 모두 그들이 지배하던 시기였다. 금융, 비료, 잡화점 등 전 분야를 그들이 지배했다. 상술도 한 수 위였다. 선비 집안에서 자란 아버지 조명희 선생은 상인 기질이 아직은 몸에 배어 있지 않았다. 고전을 면치 못했다. 대규모 자본과 조직적인 판매망으로 공세를 펴는 일본 도매상들과의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물건을 대 준 사람들은 대금 독촉을 해오는데 물건을 가져간 소매점들은 제때 물건값을 주지 않아 극심한 자금난에 시달렸다. 그나마 소매상들의 주문도 줄어들어 재고만 쌓여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물건을 쌓아 놓은 창고에 화재까지 발생했다. 아버지는 사업을 시작한 지 3년도 버티지 못하고 포목점은 끝내 문을 닫고 말았다. 풍족했던 집안이 생계를 이어가기도 힘들 정도였다.
조중훈은 하루아침에 가세가 기울고 아버지가 실의에 빠져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고민에 빠졌다. 조중훈은 그때 전혀 알지도 못하는 생소한 사업 분야에 뛰어드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런 깨달음은 추후 그의 사업 일생에 사업 철학이 되었다.
조중훈은 이런 철학으로 무리한 사업 확장을 경계했다. 한국 경제가 고도성장 가도를 달리던 1970년대 기업마다 물불 가리지 않고 사업을 확장할 때 그룹 내 임원들이 ‘땅을 사고 공장을 지어 제조업에 진출해야 한다’라고 건의했지만 조중훈은 그때마다 고개를 저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남들이 한다고 따라 하는 것은 기업가의 길이 아니라고 했다. 오직 그가 잘 알고 있는 ‘수송(輸送, Transportation) 외길’을 지킬 뿐이었다. 수송이란 기차, 자동차, 배, 비행기 등으로 사람이나 물건을 실어 옮기는 것이다.
조중훈은 이런 사업 철학을 ‘낚싯대론’으로 변형시켜 자신의 이론으로 정립시켰다. 낚시꾼이 낚싯대를 여러 개 드리운다고 고기를 많이 잡는 게 아니라 하나의 낚싯대라도 포인트(Point)를 잘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1980년대 외환위기 때 이 낚시론은 빛났다. 우리 재계가 대마불사(大馬不死)론을 펴면서 몸집을 무한히 키웠으나 그 무게에 짓눌려 줄도산을 면치 못했지만 하나의 낚싯대로도 포인트만 잘 잡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조중훈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조중훈은 ‘넓이’가 아니라 ‘깊이’의 경영을 했다. 돈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하겠다는 문어발식 확장을 경계하고 가장 잘할 수 있는 ‘수송’에 전부를 걸고 파고들었다.
조중훈은 훗날 여러 계열사를 설립하지만 모두 수송에 필수 불가결한 업종을 수직계열화한 것뿐이었다. 조중훈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생계가 위협받자, 마음 편하게 학교를 다닐 수가 없었다. 비록 차남이라고 하지만 여섯이나 되는 동생들을 생각하면 이들을 굶기지 않고 교육시키는 일이 예삿일이 아니었다.
조중훈은 어느 날,
“아버지, 집안 형편이 어려운 데 제가 계속 학교에 다닐 수가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부모님의 짐을 덜어드리는 것이 도리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학교 공부는 여기에서 중단하려고 합니다.”
아버지 조명희 선생은 깜짝 놀랐다.
“아니 학교를 중퇴하다니 말이 되겠느냐.”고 만류했다. 그러나 조중훈의 결심은 확고했다. 그리고 조중훈의 이때의 결심은 그의 인생행로를 크게 바꾸었고 우리 경제 성장사(史)에 대기업 그룹의 탄생을 가져오게 되었다. 한국에게 행운이었다.
조중훈이 선택한 곳은 경남 진해에 있는 ‘해원(海員)양성소’였다.
진해고등해원양성소는 1919년 1월 31일에서 1945년 8월 15일까지 있었던 전문학교였다. 한국해양대학교의 모체이기도 하다. 이곳은 학교라기보다는 선원이나 선박 정비사를 양성하는 기술 학원에 가까웠다.
이곳은 조중훈에게는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기술을 가르쳐 주는 데다 한 달에 8원이 넘는 봉급까지 주었다. 당시 보통학교 선생님 월급이 15원인 것을 감안하면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조중훈은 월급의 일부를 부모님 생계비에 보탤 수 있었다.
해원양성소의 생활은 배가 뭔지 항해가 뭔지도 모르는 어린 학생들에게는 혹독한 교과 과정이었지만 조중훈에게는 힘든 줄도 모르고 신나는 나날이었다. 기계에 호기심이 많았던 그는 밤잠을 설칠 정도로 기술을 익혔다. 그 결과 조중훈은 2년 만에 해원 양성소 기관과를 우등으로 졸업했다. 그의 앞길이 트이는 순간이었다. 조중훈은 우등생들만 발탁되는 일본 고베(神戶)에 있는 후지무라조선소에서 일하는 수습생이 되었다.
그는 부관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갔다. 그의 나이 17세였다. 당시 일본은 조선(造船)과 함께 항해기술에서 세계 선진국 수준에 올라 있었다. 조중훈은 해원양성소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 현대식 선박과 항해술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일본에서도 그의 손재주는 인정받았다. 여덟 살에 재봉틀을 분해해 다시 복원시켰던 그 재능이 어딜 가겠는가! 조중훈의 기계에 대한 재능은 소문이 나고 배뿐만 아니라 오사카와 히로시마 등지의 공업 지대로 스카웃 되었고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조중훈은 가르쳐 주는 것보다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간에는 작업장에서 기술을 익히고 밤에는 하숙방에 돌아와 독서에 몰두했다. 매일 동네 서점에서 책을 빌려 읽었는데 그날 빌린 책은 밤을 새워서라도 전부 읽어야 했다. 조선소에서 한 달 일하고 받는 돈이 20원인데 책 한 권 빌리는 값이 2~3전이었다. 월급에서 여섯이나 되는 동생들 학비를 부치고 나면 책 반납이 늦어 벌금을 물게돼 끼니 걱정을 해야 했다. 조중훈은 이때 삼국지(三國志)를 즐겨 읽었다.
왕성한 독서열은 조중훈에게 냉철한 판단력과 인문적 통찰을 단련하는 담금질이었다. 열정과 냉정을 넘나들며 무쇠처럼 탄탄해진 지혜와 통찰은 훗날 조중훈이 펼치는 사업의 견고한 지반(地盤, Ground)이 되었다.
조중훈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서 책을 밤새워 읽다가 폐(肺)결핵을 앓기도 했다. 헌책방에서 빌려다 본 고서(古書)가 화근이었다. 낡은 책장을 침을 발라가며 읽다가 결핵균에 감염된 것이다.
어린 나이에 학업을 중단하고 낯선 일본 땅에서 고생하다가 무서운 병까지 얻어 피골이 상접해 돌아온 아들을 본 어머니는 가슴이 미어졌다. 당시 폐결핵은 치사율이 높은 일급 전염병이었다. 치료약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폐결핵에는 단백질을 많이 섭취해야 한다. 어머니는 돈이 부족해 고기를 먹일 형편이 못 돼 이웃에서 돈을 빌려 쌀을 조금 사서 동네 설렁탕집으로 갔다. 식당 주인에게 가마솥 바닥에 남아있는 고깃국물에 쌀을 넣어 끓여 달라고 부탁해 그것을 가져다 아들에게 먹였다. 그 정성으로 몸을 추스른 조중훈은 돈을 벌기 위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