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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한국전쟁

(냉전시대 최초의 열전)

베른트 슈퇴버 (지은이), 황은미 (옮긴이), 한성훈 (해제)
여문책
17,000원

일반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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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한국전쟁 (냉전시대 최초의 열전)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근현대사 > 한국전쟁 이후~현재
· ISBN : 9791195651153
· 쪽수 : 324쪽
· 출판일 : 2016-06-20

책 소개

한국전쟁(1950~1953년)은 냉전시대 최초의 열전이었다. 베른트 슈퇴버는 이 전쟁이 어떻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3년이나 지속된 비극이 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무자비하고 가혹하게 진행되었는지를 국제사의 시각에서 조망한다.

목차

한국어판 서문
서론: 냉전시대 최초의 열전

1. 일제 식민지 조선, 1910~1945년
일본의 점령 | 항일운동 | 일본 전시경제하의 한반도 | 전후시대를 위한 준비

2. 한반도의 분단, 1945~1950년
점령시대의 종식 | 38선 | 1948년의 선거와 남북한 정부 수립 | 해방과 재통일의 유토피아

3. 한국전쟁의 시작, 1950년 6~10월
6?25: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공격 | 남한 방어를 위한 결정들 | 인천 상륙 | 북한 점령

4. 전쟁의 전환점과 휴전, 1950년 10월~1953년 7월
압록강: 핵전쟁의 경계에서 | 폭탄과 네이팜탄 | 기억에서 지워버린 내전 | 1953년: 휴전

5. 한국전쟁이 전 세계에 미친 결과
미국 | 소련 | 중국 | 유럽

6. 1953년부터 두 나라로 갈라진 한반도
북한: 스탈린주의 독재의 완성 | 남한: 반공산주의의 선봉장 | 냉전의 그늘에 있는 나라들

7. 냉전 이후 한반도의 갈등
지속적인 위기 | 개성: 작은 통일 | 북한의 핵무기

에필로그: 냉전이 빚어낸 마지막 분단국가
해제: 독일 역사학자가 본 한반도와 한국전쟁

한국사 연대표 | 미주 | 사진 출처 | 참고자료 | 찾아보기

저자소개

베른트 슈퇴버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61년에 태어났다. 독일 괴팅엔대학과 빌레펠트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포츠담대학 역사학부 교수이다. 독일 현대사는 물론 냉전에 대한 폭넓은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는 『냉전. 극단의 시대사(Der Kalte Krieg. Geschichte eines radikalen Zeitalters 1947~1991)』(Muenchen, 2007), 『공산주의로부터의 해방. 냉전기 미국의 해방정책, 1947~1991(Die befreiung vom Kommunismus. Amerikanische Liberation Policy im Kalten Kriegm 1947~1991)』(Koln, 2002)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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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은미 (옮긴이)    정보 더보기
경기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보훔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현재 서울대, 성균관대. 한신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칩니다. 옮긴 책으로 『마데이라 섬의 고래』 『낭만동화집』(공역) 『아동·청소년 문학의 서』(공역』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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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훈 (지은이)    정보 더보기
사회학자. 연세대학교 대학원 사회학과 박사, 현재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연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에서 ‘시민사회의 대안적 발전모델에 관한 동아시아 비교연구’와 국학연구원에서 ‘월남민 구술생애사 조사연구’에 전임연구인력으로 일했다.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으며 연세대학교에서 최우수강사로 선정되어 총장상을 수상했다.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임용준과 허원근 의문사건, 강제징집 녹화사업을 조사했고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한국전쟁 때 일어난 민간인 학살사건을 밝히고 종합보고서를 작성했다. 저서로 『전쟁과 인민: 북한 사회주의 체제의 성립과 인민의 탄생』(2012), 『가면권력: 한국전쟁과 학살』(2014), 『학살, 그 이후의 삶과 정치』(2018), 『인민의 얼굴: 북한 사람들의 마음과 삶』(2019)이 있다. 함께 쓴 책으로 『인권사회학』(2013), 『한국현대 생활문화사 1950년대: 삐라 줍고 댄스홀 가고』(2016), 『질적 연구자 좌충우돌기: 실패담으로 파고드는 질적 연구 이모저모』(2018)가 있다. 그동안 발표한 글은 「국가폭력과 반공주의: 고문조작간첩 피해자를 중심으로」(2015), 「하미마을의 학살과 베트남의 역사 인식: 위령비와 ‘과거를 닫고 미래를 향한다’」(2018) 외에 여러 편이 있다. 사회인문학과 예술의 만남, 연구주제의 형상화를 중요하게 생각해 2014년 제10회 광주비엔날레 “터전을 불태워라” 오프닝 작품 〈내비게이션 아이디Navigation ID〉 제작에 참여했다. 민간인 학살을 다룬 이 작품은 경산 코발트 폐광과 진주 명석면 용산고개에서 발굴한 유해 그리고 유족들을 광주로 이송하는 전 과정을 현장에서 생중계한 퍼포먼스였다. 세월호 참사 이후 연극 동인 ‘혜화동1번지’의 초청으로 죽음에 대한 사유와 국가 책임, 가해자를 주제로 강연하면서 대학로와 인연을 맺었다. 이를 계기로 2017년 두산아트센터에서 공연한 해보카 프로젝트HaVokA Project의 〈캇트라인〉에서 배우로 무대에 섰고, 다양한 연극에서 드라마투르기에 관심을 갖고 관객들을 만났다. 장기적인 사회변동에 주목해 중대한 인권침해와 사회운동, 한국전쟁이 남북한 사회에 미친 영향, 북한 인민의 사회상을 꾸준히 밝혀왔으며 ‘평화통일운동과 남북교류협력 구술채록’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전쟁과 평화에 관한 민주시민교육 강연과 글쓰기에 나섰고, 최근에 성간 우주와 생명체의 근원에 대한 탐구에 빠져 종로문화재단 아름꿈도서관의 2020년 ‘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에서 기후위기를 주제로 강연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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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한국전쟁은 냉전의 범주에서 초강대국들로서는 포커게임이자 한반도로서는 비극이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냉전 최초의 ‘작은’ 열전이었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글로벌 차원까지 확장되어 수많은 영향을 미쳤다. (중략) 글로벌 차원의 문맥에서 살펴보면 한국전쟁은 제1차 베를린 위기와 단계적으로 확대되던 유고슬라비아 위기 이후에 전선을 명확히 한 또 하나의 사건이었다.


국외자들에게는 놀랄 만한 일이었지만 1950년 1월 스탈린은 전쟁을 결정했다. 그 결정에는 한편으로 소련 최초의 핵폭탄 실험이 성공하고 중국의 내전에서 마오쩌둥이 승리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1월 12일 방어선에 관한 애치슨의 발언에서 보듯이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무관심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입증된 바에 따르면 이 소련 독재자는 1월에 승리를 구가하던 마오쩌둥을 만난 직후인 2월 9일 한국의 통일에 필요한 ‘해방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김일성이 원한 조치들을 승인했다고 밝혔다. 물론 해방전쟁 작전이 실패할 위험을 최소화하려면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직접적인 개입은 꺼렸다. 그는 김일성에게 남쪽에서 생각만큼 쉽사리 승리하지 못할 경우 중국에 물어보라고 전했다. 스탈린은 적어도 그 시점에는 미국과의 직접적인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소련의 전력이 비록 몇 년 전부터 증강되면서 냉전의 조건에 맞게 개편되고는 있었지만 결코 충분치는 않았다. 물론 스탈린은 애치슨이 말한 방어선과 관련해 미국이 한국에서의 전쟁에 개입하리라고 믿지 않았다. 1948년 말 아시아 정책과 관련해 미국 정부의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결의된 제48호 문건 역시-이 문건은 불투명한 통로로 크렘린에 넘어갔다-한국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 없었으며 스탈린이 애치슨의 발언에서 예상한 바를 증명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 모든 것은 소련의 당서기장을 지낸 흐루쇼프의 회상록에 담긴 것으로서 1970년 미국에 처음으로 알려졌다. 물론 그 시기에 이것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흐루쇼프가 특히 강조했듯이 스탈린이 일반적으로 동의했음에도 김일성은 마오쩌둥과 합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이의제기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마오쩌둥 역시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도 내전이기 때문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으리라고 예상하면서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결정되었다.
1950년 1월 19일 모스크바의 만찬자리에서 김일성이 말한 바에 따르면 상황은 실제로 그런 식으로 전개되었다. 북한의 이 최고지도자는 소련은 나라를 통일하려는 자신을 돕지는 못하지만 마오쩌둥은 항상 북한을 지원해줄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그가 추측한 바에 따르면 모스크바가 예전의 우월감에서 자신에게 원자폭탄 개발에 관한 청사진을 주지 않은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이 가장 심각하다고 느낀 것은 소련의 ‘수정주의’였다. 수정주의는 ‘맏형’이 서구와의 협상과 ‘평화적 공존’ 전략을 통해 세계혁명의 이념에서 명백하게 물러서는 셈이었다. 이것이 1960년 ‘중소 블록’을 깨뜨리는 역할을 했다.
마오쩌둥은 공산주의 진영 중에서도 이웃인 북한의 김일성을 단지 커다란 정치적 도전에 직면한 신출내기로 여겼다. 1950년 5월 스탈린이 주선해 김일성과 마오쩌둥 사이에 이루어진 개인적 대화는 껄끄럽게 진행되었다. 마오쩌둥은 처음에는 망설이더니 북한과의 국경에 군대를 주둔시키겠다고 제안했다. 김일성은 자신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이것을 포기할 수 있다고, 심지어는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 북한에서 김일성의 명성은 특히 일본과의 투쟁에서 성공한 빨치산 지도자로 쌓아진 것이다. 모스크바에서 그는 전쟁을 산책하는 정도로 묘사했기 때문에 남한을 상대로 한 ‘해방전쟁’ 계획을 밀어붙이게 되었다. 그래서 김일성은 마오쩌둥이 매우 불손하고 거만하게 여겼던 회동 중에 거침없이 북한군만으로도 이 일을 처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여기서 김일성은 남한에서 이미 활동 중인 빨치산을 염두에 두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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