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일본소설 > 1950년대 이후 일본소설
· ISBN : 9791196238773
· 쪽수 : 280쪽
· 출판일 : 2023-07-30
책 소개
목차
1장 ~ 19장
저자 후기
책속에서
고광수가 일본에 온다.
“어엇?”
철수는 고교 동기생 김태준에게 걸려 온 전화를 받고 수화기를 귀에 바짝 붙였다.
“광수의 처남이 근처에 살잖아, 우리 가게에 가족끼리 식사하러 와서 알려주더군.”
“정말이야?”
철수는 뜻밖의 소식에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광수 얘기도 그렇지만 오랜만에 전화한 태준이의 수술 경과도 신경 쓰였다.
“나 말야? 이젠 뭐 고물이 다 됐지. 후후후.”
태준이가 고물이라는 단어에 악센트를 붙이며 물기 없는 콧소리로 웃는다. 나이가 들어가니 묘한 버릇까지 생긴 건가.
총련계 민족단체에서 전임으로 근무한 태준이는 여러 산하단체를 거치다 40년째가 되는 3년 전에 은퇴했다. 퇴직하면 이케부쿠로 변두리에서 숯불고기 식당을 하는 아내한테 기대어 느긋하게 살 거라 했는데, 갑자기 근육과 운동신경에 이상이 생겨 ‘근무력증’을 진단받은 후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불행인지 다행인지 조기 위암까지 발견되어 위장 3분의 2를 절제했다.
그렇다고 철수처럼 일본에 남은 동기생들의 미래가 활짝 열린 것도 아니었다. 당시 일본의 상황은 재일조선인의 사회진출을 음습하게 가로막았다. 대학 진학은커녕 고교 졸업 후 이렇다 할 꿈조차 품어보지 못한 채 그저 학교 밖으로 방출되어야 했다. 수많은 재일조선인 젊은이들이 살길을 찾으려 일본 사회의 문을 억지로라도 열어보려 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미 포기에 가까운 심정인 것이 사실이었다. 고교 졸업장만으로 만족하고 곧바로 취업하지 않으면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가정이 졸업생의 90%를 차지했을 정도다.
정확히 그 무렵이다. 재일동포의 조국 귀국을 환영한다는 공화국 정부의 성명이 발표된다.
그때나 지금이나 남쪽인 한국에 본적을 둔 이들이 압도적이지만 당시 한국 사회는 불안이 극도로 심각했다. 그런 와중에 북에서 발표한 성명은 미래를 꿈꿀 수 없었던 재일 청년들에게는 찬란한 빛과 같은 소식이었다.
‘우리한테도 조국이 있다.’
‘버블 경제기’라는 호화로운 시절도 있었건만 그다지 재미도 보지 못한 채 당시에 과잉 투자를 한 후유증이 최근 10년간 끈질기게 이어졌다.
그 시절엔 ‘금융권 대출은 사내의 능력’이라는 분위기가 만연해서 돈에 대한 감각이 마비된 상태였다. 이윽고 거품은 꺼져버렸고 뭔가 심상치 않은 걸 깨달았을 땐 발끝이 깊은 늪에 빠진 후였다.
버블이 무너지고 10년, 그동안 자산을 야금야금 갉아먹으며 경기가 회복되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계속해서 개미지옥으로 빠져들 뿐이다. 적어도 5년 전에는 대담하게 결단을 내렸어야 했다고 여러 번 후회하면서도 한 번 나락으로 떨어지니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늪 밖으로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