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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영미소설
· ISBN : 9791196554842
· 쪽수 : 220쪽
· 출판일 : 2021-01-15
책 소개
목차
책 머리에
오, 붉은 머리의 마녀
행복의 나락
비행기 환승 세 시간 전에
새로 돋은 잎
겨울 꿈
역자 후기
리뷰
책속에서
서른다섯 살에서 예순다섯 살까지의 세월은 설명할 필요 없는 혼란스러운 회전목마처럼 수동적으로 사는 멀린 앞을 스쳐 돌아갔다. 회전목마 같다는 건 적당한 비유다. 엇박자로 달리거나 숨 가쁘게 삐거덕거리는 말들이 돌아가고, 애초에는 파스텔 칼라였으나 이제는 칙칙한 회색과 갈색으로 바랜 모습이 곤혹스러우면서 참을 수 없이 어지러운 회전목마다. 어린 시절이나 십 대 시절의 회전목마와는 절대 같을 수 없었고, 특정 구간을 달리고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청춘의 롤러코스터도 이와 같을 수 없다. 대부분의 남녀들에게 이 30년의 세월은 점차 인생에서 물러나는 일로 채워진다. 처음에는 젊음의 무수한 즐길 거리와 호기심으로 가득 찬 수많은 피난처가 있는 앞자리에서 물러나서는, 피난처가 훨씬 줄어든 줄로 후퇴하는 것이다. 여러 야망이 사라지며 한가지 야망만이 남게 되고, 여러 오락거리가 한 가지 오락거리로 줄고, 많은 친구들이 소수의 친구로 줄어들다가 그들에게도 무감각해진다. 그러다가 마침내 강하지 않은데 강한 자가 되어 고독하고 황량하기 그지없는 곳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는 포탄들이 지긋지긋한 휘파람 소리를 내지만 그 소리조차 거의 들리지 않고, 두려움과 피로를 반복하면서 우리는 주저앉아 죽음을 기다린다.
때때로 하룻밤 혹은 이틀 밤 잠을 못자면 눈을 뜬 채 악몽을 꿀 때가 있다. 새로 돋는 태양과 더불어 엄청난 피로감이 급습하면서 주변 삶의 질은 확 달라진다. 누군가 영위하던 삶이 알고 보니 그저 삶의 가지에 돋은 순에 불과하고, 그저 영화나 거울처럼 삶을 비추며 사람들, 거리들, 집들은 아주 희미하고 혼란스러운 과거가 투사된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전적으로 명료하게 확신하게 되기도 한다.
제프리가 아픈 첫 몇 달 동안 록산은 그런 상태였다. 록산은 완전히 녹초가 되었을 때만 잠을 청했고, 구름이 낀 것 같은 상태로 눈을 떴다. 차분한 목소리로 이어지는 기나긴 진찰, 복도에 희미하게 배어드는 약 기운, 한때 수많은 즐거운 발자국 소리가 울려 퍼졌던 집안을 걸어 다니는 갑작스러운 까치걸음, 그리고 무엇보다도 함께 누웠던 침대에서 베개를 베고 누운 제프리의 하얀 얼굴, 이 모든 것들이 그녀를 짓눌렀고, 돌이킬 수 없이 늙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