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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조선사 > 조선시대 일반
· ISBN : 9791196895914
· 쪽수 : 1510쪽
· 출판일 : 2022-06-10
책 소개
목차
한성판윤 화보 (영정)초상화) 4
축하 드리는 말씀 서울시장 오세훈 12
한성판윤을 펴내며 14
한성의 지도 20
일러두기 21
색인(한성판윤 성씨별 분류) 24
1장
1대 판한성부사 성석린 ~ 101대 판한성부사 김연지 41
2장
102대 판한성부사 이석 ~ 439대 한성판윤 윤이지 135
3장
440대 한성판윤 윤경 ~ 1008대 한성판윤 이사관 399
4장
1009대 한성판윤 채제공 ~ 1325대 한성판윤 김문순 719
5장
1326대 한성판윤 윤광보 ~ 1758대 한성판윤 김병교 867
6장
1759대 한성판윤 홍종서 ~ 2209대 한성판윤 장헌식 1081
한성판윤 (선생안) 1344
부록 1421
참고 문헌 1502
책속에서
1대 판한성부사 성석린(成石璘)
[신상내용]
생몰연대 1338년고려 충숙왕복위7 ~ 1423년세종5 - 86세
본관 창녕昌寧
자 자수子修
호 독곡獨谷
시호 문경文景
상훈 단성보절찬화공신, 익대공신, 좌명공신, 창녕부원군
저서 독곡집. 건원릉비문(서예)
배향 물계서원(창녕)
가족 증조-공필公弼, 할아버지-판도총랑 군미君美, 아버지-정당문학 여완汝完
어머니-나주나씨(밀직사지신사 나천부羅天富의 딸)
동생-석용石瑢(보문각대제학 성삼문成三問 증조부), 석연石珚(성현成俔 증조부)
부인-순흥안씨(정당문학 안원숭安元崇의 딸), 2남 2녀
장남-지도志道, 차남-발도發道(판한성부사), 사위-조휴趙休(유후), 왕탄王坦(고려 종실宗室)
묘소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고일리
[관직경력]
판한성부사 재임기간 : 1395년태조4 6월 13일 ~ ?
고려 말 조선 전기의 문신
<고려시대>
1331년충혜왕2 문음직 사온승 동정(4세)
1355년공민왕4 사마시 3등 입격
1357년공민왕6 문과 급제, 국자감 직학, 성균관 사성, 밀직제학
1363년공민왕12 전의시 주부
1365년공민왕14 군기감 승, 보문각 직제학
1368년공민왕17 해주목사
1369년공민왕18 성균관 사성, 예문관 직제학
1373년공민왕22 진현관 직제학
1375년우왕1 밀직제학, 정당문학, 양광도관찰사
1389년창왕1 대제학, 문하찬성사
<조선시대>
1392년태조1 조선 개국과정에 한때 이색李穡 일당으로 몰려 고향에 안치
1393년태조2 태조 2년 2월 삼사 우복야, 9월 문하시랑 찬성사
1395년태조4 1월 판개성부사, 윤6월 판한성부사
1399년정종1 1월 평양부윤, 6월 문하시란 찬성사, 12월 우정승
1400년정종2 3월 좌정승, 9월 좌정승, 창녕백
1401년태종1 창녕백을 창녕부원군으로 개칭
1402년태종2 영의정부사 겸 판개성유후사사
1403년태종3 우정승
1405년태종5 영의정부사
1406년태종6 세자 이제(양녕대군) 전위 논란
1407년태종7 시무20조 올리다. 좌정승
1408년태종8 세자 사부, 좌정승 사임-재임명
1412년태종12 영의정부사
1414년태종14 창녕부원군
1415년태종15년 영의정부사
1418년태종18년 세종 즉위
1421년세종3 궤장을 하사 받다
1423년세종5 1월 21일 포천 향리에서 서거(86세)
[생애일화]
그는 조선개국공신이며, 건국 초의 정치적 안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태조 이성계와 태종 간의 갈등 관계를 해소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함으로써 왕위 계승을 둘러싼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고 신왕조의 미래를 여는 국가적 기반을 조성하는 데 공헌하였다.
고려 말 명문가 출신으로 4세 때 문음으로 사온서승 동정직을 받고, 과거 급제 후 중간 관직에서 익힌 실무적 능력을 통해 행정의 달인으로 공민왕의 총애를 받았다.
왕조 교체의 격변기에 고려 말 최영과 정몽주의 구세력이 제거된 다음, 이성계로 대표되는 신진세력에 동참하여 판한성부사를 거쳐 영의정에 올라 새 국가 개창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
새 도읍지를 물색하는 과정에 적극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가 판개성부사로서 수도행정을 꿰뚫고 있었던 경험과 식견이 누구보다도 탁월하였음을 태조가 각별히 인정하여 신 도읍지의 수장인 초대 판한성부사의 적임자라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특이한 것은 판한성부사로 재임하는 동안 경복궁과 종묘 및 도성 축조 등 수많은 건설사업이 벌어졌음에도 왕조실록에 공사의 진척과 관련하여 특별한 사고 등의 기록이 없다는 점이다. 아마도 합리적인 건설행정을 펼쳐 재정조달과 인력동원 등에 무리가 없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는 정권안정의 중재자로서, 고매한 인품과 탁월한 경륜가로서 당대의 선비들로부터 칭송과 존경을 받은 인물이었다. 또한, 학문과 덕망을 갖춘 인격자로서 세자부가 되어 충녕대군의 세자시절에 군왕으로서의 자질을 보양토록 진강하기도 하였다.
4대의 임금을 섬기면서, 영의정으로 있을 때 <시무時務20조>를 올려 신왕조의 국정지표를 천명하였으며, 개인적으로는 경학에 통달하고 필법이 신묘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가 남긴 글을 모아 한성판윤을 지낸 손녀사위 김연지가 <독곡집獨谷集>을 만들었는데, 훗날 서거정徐居正은 “이 책에는 기개와 고결한 문사로 넘쳐흘러 드높은 도덕, 위대한 훈업, 풍부한 문장 등이 능히 한 시대를 울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라고 매우 아름답게 평하였다.
38대 판한성부사 황 희(黃喜)
[신상내용]
생몰연대 1363년공민왕12 ~ 1452년문종2 - 90세
본관 장수長水
초명 수로壽老
자 구부懼夫
호 방촌庬村
시호 익성翼成
상훈 좌익공신, 순충보조공신, 남원부원군(추봉)
저서 <방촌집>
배향 세종 묘정, 옥동서원, 창계서원, 반구정(영정)
가족 증조-증이참 석부石富, 조부-증참찬-균비均庇, 아버지-도호부사 군서君瑞
어머니-용궁김씨(김우金祐의 딸)
부인-판사복시사 최안崔安의 딸, 청주양씨(공조전서 양진楊震의 딸)
아들-치신致身(판한성부사), 보신保身, 수신守身(영의정)
묘소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금승리 산1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4호
[관직경력]
판한성부사 재임기간 : 1418년태종18 1월 11일 ~ 1418년태종18 5월 11일
조선 전기의 문신
<고려시대>
1376년우왕2 음보로 복안궁 녹사
1389년창왕1 문과 급제, 성균관학록
<조선시대>
1394년태조3 성균관학관 겸 세자우정자, 직예문관‧춘추관‧감찰
1398년태조7 문하부우습유
1399년정종1 문하부우보궐, 경기도도사, 형조‧예조‧이조‧병조정랑
1401년태종1 도평의사사경력, 병조의랑
1402년태종2 대호군 겸 승추부경력
1404년태종4 우사간대부, 승정원좌부대언
1405년태종5 승정원지신사
1409년태종9 참지의정부사, 형조판서
1410년태종10 지의정부사, 대사헌
1411년태종11 형조판서
1413년태종13 예조판서
1415년태종15 이조판서, 행랑도감제조, 참찬, 호조판서
1416년태종16 공조판서, 평안도도순문사 겸 평양윤
1418년태종18 판한성부사
1422년세종4 참찬
1423년세종5 예조판서, 강원도관찰사 겸 판우군도총제
1424년세종6 찬성, 대사헌
1426년세종8 이조판서, 찬성, 우의정 겸 판병조사
1427년세종9 좌의정 겸 판이조사
1430년세종12 사헌부 탄핵으로 좌의벙 파직
1431년세종13 영의정부사, 영집현전경연‧예문관‧춘추관‧서운관사, 세자사, 상정소도제조
[생애일화]
그는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하였는데, 조정의 요청과 동료들의 천거로 새 왕조에 참여하게 되었다.
태종 때 승정원지신사 박석명의 후임으로 발탁되었고 6조의 판서를 거치며 유능한 관료로서 활약상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양녕대군의 실행失行에 따른 세자 폐출의 불가함을 극간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유배되기도 하였다.
세종의 치세가 시작되면서 일찍이 그의 능력을 꿰뚫어봤던 상왕 태종이 그의 기용을 권유하여 관직이 다시 제수되었고, 18년 동안 영의정으로서 국정을 통리統理함으로써 세종성세世宗盛世를 이루는 데 기여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사관이 쓴 그의 졸기卒記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황희는 관대하고 후덕하며 침착하고 신중하여 재상宰相의 식견과 도량이 있었으며, 후덕한 자질이 크고 훌륭하며 총명이 남보다 뛰어났다. 집을 다스림에는 검소하고 기쁨과 노여움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으며, 일을 의논할 적에는 정대正大하여 대체大體를 보존하기에 힘쓰고 번거롭게 변경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 재상이 된 지 24년 동안에 중앙과 지방에서 우러러 바라보면서 모두 말하기를 ‘어진 재상’이라 하였다.”
그의 겸손하고 후덕한 인품을 말해주는 많은 설화가 있는데 그 중 몇 가지를 들어본다.
<네 말이 옳다> <누렁소와 검정소> <종의 아이가 커서 장원급제> <종의 아이가 문서에 오줌 싸기>에서는 온화하고 남을 배려하며 베풀기를, <김종서 기강잡기> <손님으로 예우하기> <장남의 집들이>에서는 우유부단하지 않고 소신과 원칙을 지키는 모습을, <단 한 벌뿐인 조복><청백리 황정승과 박광대> <멍석 방바닥>에서는 청빈한 생활태도와 벼슬아치의 규범을 보여주는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44대 판한성부사 맹사성(孟思誠)
[신상내용]
생몰연대 1360년공민왕9 ~ 1438년세종20 - 79세
본관 신창新昌
자 자명自明
호 고불古佛‧동포東浦
시호 문정文貞
상훈 청백리
가족 증조-議郞 의義, 할아버지-尙書 유裕, 아버지-수문전제학 희도希道
어머니-장령 조문우趙文祐의 딸
부인-흥양최씨(상호군 최담崔潭의 딸)
묘소 경기도 광주시 직동 산 27. 경기도 기념물 제21호
[관직경력]
판한성부사 재임기간 : 1419년세종1 9월 25일 ~ ?
고려말 조선 초기의 문신
1386년우왕12 문과 급제, 춘추관검열, 전의시승, 기거랑, 우헌납, 수원판관, 내사사인
1392년태조1 예조의랑
1399년정종1 간의우산기상시, 간의좌산기상시
1401년태종1 좌사간의대부, 동부대언, 이조참의
1407년태종7 예문관제학, 진표사로 명나라에 가는 세자의 시종관으로 다녀오다
1408년태종8 사헌부대사헌
1414년태종14 판충주목사, 관습도감제조
1415년태종15 풍해도도관찰사
1416년태종16 이조참판, 이조판서
1417년태종17 왕이 친림한 문과 복시 독권관, 호조판서, 충청도도관찰사
1418년태종18 공조판서, 예문관대제학
1420년세종2 이조판서
1421년세종3 의정부찬성사
1427년세종9 우의정, 태종실록 편찬 감관사
1432년세종14 좌의정
[생애일화]
그는 인품이 소탈하고 조용하며 엄하지 않았다. 평소에 어질고 부드러웠으나 조정의 중요한 정사를 논의할 때에는 신중하면서도 과단성이 있었다.
대사헌으로 있을 때, 태종의 사위 조대림趙大臨을 왕에게 보고하지 않고 잡아다 고문하였다. 이 일로 왕의 노여움을 사 죽을 뻔 했으나, 영의정 성석린의 도움으로 죽임을 면하였다. 훗날 그가 성석린의 집 앞을 오고 갈 때면 늘 말에서 내려 생명의 은인에게 예를 표하고 지나갔다고 한다.
『태종실록』의 편찬이 완료되자 세종임금이 한번 보고자 하였다. 그러자 그가 “왕이 실록을 보고 고치면 반드시 후세에 이를 본받게 되어 사관史官이 두려워서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것”이라고 반대하여 임금이 이에 따랐다.
맹사성은 고려 말 명장인 최영崔瑩장군의 손녀사위로서 장군이 살던 집을 물려받았는데, 여기에 은행나무를 심어 오늘날 고택과 구괴정, 쌍행수 등을 합쳐서 ‘맹씨행단孟氏杏壇“이라 부르며 사적 109호로 지정되어 있다.
효성이 지극하고 살림살이가 검박하여 오로지 녹미祿米로만 생활하였으며, 출입할 때는 소를 즐겨 타서 사람들이 그가 재상인 줄을 잘 몰랐다고 한다.
음악에 조예가 있어 피리를 잘 불었고, 악기를 만들어 즐겼다.
공당문답公堂問答 등의 일화가 여러 가지 있다.
영의정 황희와 국정의 동반자로서 같이 복무하였으나, 황정승보다 일찍 세상을 하직하여 영의정에 오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