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벌코프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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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루이스 벌코프 박사에 대해 간략히 소개해 보자면, 그는 1873년에 네덜란드에서 태어났으며, 1882년에 가족들과 함께 웨스트 미시건West Michigan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1893년에는 C·R·Cthe Christian Reformed Church 교단의 신학교(지금의 칼빈 신학교Calvin Theological Seminary)에 다니기 시작했으며, 그 곳에서 헨드리쿠스 부커Hendericus Beuker, 1834-1900의 지도 가운데 공부하면서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와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의 저술들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칠년 뒤인 1900년에 벌코프는 칼빈 신학교를 졸업하고 미시간 주 앨런데일Allendale에 있는 C·R·C 교단 최초의 목사가 되었다. 또한 그는 1902년부터 1904년까지 프린스턴 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에 다니면서 워필드B.B. Warfield, 1851-1921와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 1862-1949에게서 지도를 받았다. 벌코프의 친구였던 헨리 미터H. Henry Meeter, 1886-1963의 설명에 따르면 “벌코프는 자신이 종교 개혁 신학에 대한 통찰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보다도 게할더스 보스에게서 더 많은 빚을 졌다고 자주 말했다”고 한다.(Reformed Theology in America, 156) 그러므로 벌코프의 신학은 아브라함 카이퍼와 헤르만 바빙크, 그리고 게할더스 보스와 같은 화란 출신의 개혁주의자들의 신학체계가 근간이었음을 분명하게 알 수가 있다.
한편 그의 행적을 더욱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1904년에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한 벌코프는 곧장 미시간으로 돌아와 그랜드 래피즈Grand Rapids의 오크데일 파크Oakdale Park에서 C·R·CChrischan Reformed Church in North America 교단의 목사로 활동했다. 그리고 1906년에 그는 칼빈 신학교에서 해석학exegetical theology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1926년에는 교의학dogmatic theology 교수가 되었다. 그는 또한 1921년에는 프린스턴 신학교의 강의를 맡았기도 했으며, 1931년 9월 9일부로 칼빈 신학교의 총장이 되어 1944년에 은퇴하기까지 시무했다. 그는 일생 동안 신학, 사회 문제, 정치, 교육 및 선교에 관한 수많은 책들을 포함하는 다작의 글을 썼으며, 그러한 저술들뿐만 아니라 칼빈 포럼과 같은 개혁신학의 정기 간행물들에 수많은 기사를 게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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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근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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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학사(B.A.), 동 대학교 목회학 석사(M. Div.) 과정을 마친 후,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신학 석사(Th. M.) 과정을 마치고, 동 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조직신학으로 철학박사 학위(Ph. D.)를 받았다. 그는 박사 논문을 통해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을 주장한 톰 라이트(N. T. Wright)의 칭의론을 개혁주의 언약신학적 관점에서 비판하였다(은혜 언약의 조건성: N. T. 라이트의 칭의론 비평; The Covenant of Grace and the Conditionality: Critics on N. T. Wright's Justification). 그는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몇 년간 몇몇 신학대학원과 신학교에서 강사로 강의하였고, "목회를 위한 신학, 신학이 있는 목회"를 실천하고자 2015년 1월 11일 안양 관양동에 "한길교회"(대한예수교장로회, 합신)를 개척하여 목회에 전념하고 있다.
저서
『칭의의 복음: N. T. 라이트의 칭의론에 대한 개혁신학적 평가』, 『언약과 구원: 오직 믿음과 순종의 입맞춤』, 『올인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등 다수
역서
Peter Golding, 『현대인을 위한 언약신학: 개혁주의 사상과 전통의 흐름에서 본 신학의 열쇠』, Louis Berkhof, 『자유주의 강연: "만일에 [모든 진리의] 기초가 파괴된다면"』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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