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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응 열사 평전

김구응 열사 평전

(4·1아우내만세운동의 주역)

전해주 (지은이), 김구응열사기념사업회, 천안역사문화연구회, 김구응열사유족회 (기획)
  |  
틈새의시간
2023-04-01
  |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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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응 열사 평전

책 정보

· 제목 : 김구응 열사 평전 (4·1아우내만세운동의 주역)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근현대사 > 일제치하/항일시대
· ISBN : 9791197878343
· 쪽수 : 176쪽

책 소개

독립운동에 대하여 ‘알려진 사실’ 너머의 ‘숨겨진 진실’을 알려주는 소중한 기록. 4·1아우내만세운동을 실제로 계획하고 주동한 사람은 유관순 열사가 아니다. 주인공은 바로 당시 아우내 지역에서 진명학교 교사로 일했던 김구응 선생이었다.

목차

기획자의 말_김종수(김구응열사기념사업회 회장)
기획자의 말_이용길(천안역사문화연구회 회장)
기획자의 말_김운식(김구응 열사 손자)
추천사_김지철(충청남도교육감)
추천사_한시준(천안독립기념관장)
추천사_유낙준(대한성공회 대전교구장)
저자의 말_전해주

1장 김구응, 그는 누구인가
김구응 선생의 뿌리를 찾아서 / 진천 시절, 근대 교육의 세례를 받다 / 병천 시절, 아우내만세운동의 터를 닦다 / 김구응과 그의 가족들

2장 성공회와 진명학교
충남 병천에 기독교가 들어오다 / 성공회 선교의 시작 / 성공회 선교의 특징

3장 그날의 함성
그해 그날의 3‧운동 / 아우내(병천)에는 김구응 선생이 있었다 / 김구응, 만세운동의 주역 / 아우내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준비하다 / 아우내만세운동의 현장

4장 아우내만세운동에 대한 평가
성공회의 3‧운동에 대한 입장과 분위기 / 후손들의 삶과 ‘김구응기념사업회’

<꺼지지 않는 아우내의 횃불>_이윤옥
참고문헌 및 기타 자료 출처

저자소개

전해주 (지은이)    정보 더보기
서울에서 초중고를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했다. 직장생활을 하다 마흔이 넘어 성공회에 입문하여 49세의 늦은 나이에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4.1아우내만세운동의 근거지인 충남 병천의 성공회에서 사제로 지내면서 자연스레 김구응 열사를 알게 되었다. 김구응 열사는 병천에서 진명학교 교사로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학생과 주민들을 이끌고 만세운동에 앞장섰다. 역사의 숨은 면면을 알리고자 김구응 열사에 대한 자료를 모아 논문(2005년)을 발표했고, 이 작업을 인연으로 《4‧1아우내만세운동의 주역 김구응 열사 평전》을 펴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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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응열사기념사업회 (기획)    정보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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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역사문화연구회 (기획)    정보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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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응열사유족회 (기획)    정보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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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김구응 선생은 객지 생활을 마치고 고향인 병천으로 돌아와 진천과 입장에서 자신이 경험한 근대식 교육을 펼칠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겼다. 바로 청신의숙(淸新義塾)I이란 사설 교육기관을 직접 세워 꿈을 실현하려 한 것이다. 김구응 선생은 이를 위해 자신의 사재를 기꺼이 털었으며, 뜻을 함께하는 지역민들의 후원을 받기도 하였다. 때는 1908년, 그의 나이 21세였다. 그는 이곳에서 한학은 물론 진천과 입장에서 영국 선교사들로부터 배우고 익혀온 근대식 교육을 지역 내 어린 학생들에게 열정적으로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지역의 유지들과 지도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근대식 교육의 필요성을 알리고 그들의 지지와 후원을 받아냈다. 이와 같은 그의 행동은 이후 아우내만세운동이라는 거사를 치르는 데 도움이 되는 지역민들의 지지와 호응으로 이어졌고, 큰 힘을 발휘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 후 김구응은 1915년 수신면 장신리에 위치한 감리교회에서 운영하던 장명학교(長命學校)I의 일인(日人) 교장 밑에서 교사로서 잠시 일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학교는 감리교회가 문을 닫으면서 곧 문을 닫게 되었다. 이후 그는 1918년부터 성공회의 구세실 주교가 운영하는 진명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계속하던 중 아우내만세운동을 준비하면서 그 주역을 맡게 되었다_<병천 시절, 아우내만세운동의 터를 닦다>


당시 병천에서 진명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김구응 선생에게 3‧1만세운동은 학수고대하던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는 일본의 압제가 심해질수록 어떤 식으로든 독립하고자 일본에 항거하는 민족적 운동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있었으며 그때를 대비하여 나름대로 준비하던 차였다. 김 선생은 아우내장을 드나드는 장꾼들에게 전해 들은 전국 각지의 소식을 종합해보았을 때 만세운동이 일회성으로 그치 는 것이 아니라 점점 남북으로 뻗어나가 전국적인 운동으로 걷잡을 수 없이 커지리라고 확신했다. 또 교사로 있는 진명학교는 영국을 모체로 하는 조선성공회에서 운영하던 곳이었기에, 영국인 신부와 그곳 전도사를 만날 기회가 잦았다. 김 선생은 이들을 통해 서울에서의 긴박한 소식을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 었던 것이다. 따라서 아우내에서 김구응 선생만큼 3‧1만세운 동의 전후 내막을 자세히 아는 이도 없었다. 또한 3월 13일 고향인 병천으로 내려온 이화학당의 유관순은 자신의 오빠를 지도했던 김구응 선생을 찾아가 서울에서 직접 자신이 참여했던 만세운동의 소식과 그곳의 긴박했던 상황, 그리고 자신이 구금되면서 겪었던 일제의 동향 등을 전했다. 유관순은 아우내에서 만세운동을 한다면 이를 준비하고 앞장서 주도할 수 있는 사람은 김구응 선생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_<아우내(병천)에는 김구응 선생이 있었다>


한편 김구응 선생이 성공회의 진명학교를 거점으로 삼아 아우내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준비했다는 것은 또 다른 정황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이는 일본이 재판한 아우내만세운동에 대한 기록에서 살펴 볼 수 있다.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아우내만세운동을 두 건의 사건으로 나누어 별도의 재판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일본 재판부가 다른 지역에서 벌어진 만세운동을 그 운동에 참여하다 잡힌 사람들을 한데 묶어 하나의 사건으로 처리했던 것과는 크게 다른 점이다. 우리는 이로 인해 바로 아우내만세 운동의 주도 세력이 하나가 아니라 최소한 둘 이상이라는 것과 두 세력이 별도로 만세운동을 준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재판부가 도저히 이 사건을 하나로 처리할 수 없었던 배경을 설명해준다. 그 이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두 세력이 아주 긴밀하게 협조하였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 병천은 무척 작은 지역인데도 대규모인 데다가 조직적인 만세운동이 한날한시에 같은 장소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두 세력이 사전에 긴밀하게 교류하고 미리 협조를 받아내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는 분명 두 세력을 연결하고 조 정하는 지역공동체가 그 중심에 있었다고 봐야 한다.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때는 지금처럼 통신이 발달했던 시절도 아니고 기껏해야 사람의 입과 발에 의존하여 연락을 주고받았을 시절에 만세운동 같은 조직적인 거사를 준비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분명 모든 일을 총괄하고 조정하던 공동체가 있었으리라고 추정하는 배경이다._<김구응, 만세운동의 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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