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과 복종 (사이의 존재가 가야할 길)
강치원 | 호모레겐스
11,700원 | 20210621 | 9791197383717
‘정직한 절망’ 속에서 발견하는 저항과 복종의 길
“이 책은 모든 일반 독자들을 위한 것은 아니다. 교회를 잘 다니고 있는 분들, 신앙에 대해 어떤 회의도 들지 않는 분들, 교회의 가르침에 늘 순종하는 분들에게 이 책은 유용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내가 믿고 있는 신앙이 자유를 선물로 주는 진리에 맞닿아 있는지를 반추하는 분들, 맹목적인 목사 추종자가 아니라 주체적으로 신앙의 길을 걷고자 하는 분들, 그저 모이기만을 힘쓰는 교회가 아니라 건강한 교회를 꿈꾸는 분들을 향하고 있다. 동굴 속 갇힌 삶에 주저앉지 않고 동굴 밖 세상으로 나와 이곳에도 계시는 하나님의 영과 함께 신앙의 지평을 넓히고자 하는 분들 말이다. 그 때문에 이 책이 상정하는 독자는 생각하는 신앙인,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인이다.”
이 책은 일종의 시리즈 성격을 지닌 ‘강치원의 광야 소리’의 두 번째 책으로 출판되었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 책이 상정하는 독자 군이다. 모범 신앙인이 아니라 신앙에 대해, 교회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회의하는 자다. 회의한다는 것은 질문한다는 의미이며, 이것은 생각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생각하는 신자의 자리를 교회 안으로 자리매김하지 않는다. 그는 시선을 교회 밖으로 돌린다. 아마도 소위 ‘가나안 신자’들을 염두에 둔 것 같다. 그래서일까? 그는 거짓 희망이 난무한 교회를 향해 ‘정직한 절망’이라는 새로운 신앙의 화두를 던진다. 그리고 희망에 대항하며 희망을 품는 역설을 이야기한 루터의 소리를 자신의 광야 소리로 들려준다. 이 소리란 단순히 루터의 소리가 아니라 윤동주와 본회퍼와 루터와 강치원이 서로 공명하여 만들어낸 울음소리다.
이 책이 나오게 된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자가 어떤 상황 속에서 ‘저항과 복종’이라는 주제에 접근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책의 뒷부분에서 저자는 그 상황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저는 기독교의 비기독교화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모든 기독교적인 용어와 전통을 새롭게 읽고 해석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노예와 종교적인 권력을 양산시키는 ‘구원’과 ‘저주’, ‘천국’과 ‘지옥’ 등의 원시적이고 범종교적인 사고의 틀을 깨고 이 감옥에 갇혀 있는 이들을 ‘출애굽’시키는 작업도 하고 있습니다. ‘계시’에 대한 과도한 집착으로 ‘이성’을 불신앙의 사도로 치부하며, 믿음을 생각하지 않는 맹신이나 비이성적인 미신으로 전락시키는 기독교의 천박성을 밝히 드러내고 그 옷을 벗기는 작업도 하고 있습니다. ‘절대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기독교가 실은 얼마나 아편을 팔고 사는 종교가 되었는지를 가슴 아프게 직시하며 ‘맛 중독’에 찌들은 신자들이 스스로 해독의 약을 찾아 먹을 수 있도록 돕는 일도 하고 있습니다. 각종 관행에 찌들어 있는 기독교의 비기독교화, 탈기독교화! 이것이 제가 하고 있는 그 무엇입니다. 이 작업의 끝에 남게 되는 기독교가 어떤 모습일지 저도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작업은 제 사고의 한계 안에 갇힌 지극히 사적인 것으로 끝날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교회사적으로 객관화하는 학문적인 작업도 병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책상 앞에서의 사변적인 유희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살아남고자 하는 속살거림에 저항하며 ‘길’ 위의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설교 강단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 학교 강단에 서서 진리를 외치는 것이 막히고 거절된다고 할지라도 영문 밖으로 나가는 그분의 ‘길’을 따라 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또 다른 길동무들을 위해 길이 되고 싶습니다. 그렇게 저는 기독교가 비기독교화된 광야에서 ‘제3의 길’을 닦고자 합니다. 단순히 ‘탈교회’. ‘탈교단’, ‘탈신학교’가 아닙니다. 관행의 길을 진리의 길인 양 걷고 있는 기독교의 ‘탈기독교’, 이것이 제가 발을 내딛은 수행의 길입니다.”(240-243쪽)
기독교에 대한 저항과 함께 길이신 예수에게 복종하는 것, 이것이 저자가 택한 길이요 독자들에게 던지는 화두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루터의 종교 개혁적 여정을 ‘저항과 복종’의 틀로 바라본다. 그리고 그 궤적을 설득력 있고 일목요연하게 풀어낸다.
그런데 이 책은 좀 섬뜩한 면이 있다. 기독교의 ‘탈기독교’를 시도한다면서 기독교의 하나님을 버린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저자는 이런 비판을 제기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인용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원제목은 ‘신이라는 망상’(The God Delusion)이다.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이 실은 인간의 망상에서 나온 산물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 주장에 대해 어느 정도 공감하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그는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이상이라고 한다.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고 한다”는 도킨스의 제사(題辭)를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신에 대한 종교적 망상’이든 ‘신에 대한 망상’이든, 그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신을 믿는 종교란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신자란 망상증에 걸린 정신병자라는 것이다. 매우 도발적인 주장이지만, 한국교회의 실상을 냉철하게 바라보면 마냥 뱉어낼 수만은 없는 말이다. 실제로 교회를 다니는 많은 사람이 종교적 망상 증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망상 증상의 절정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라, 만들어진 하나님을 믿는 아이러니이다. … ‘앎을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이 뒷전으로 밀려난 교회일수록 만들어진 신이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놀라운 것은 신을 만든 이들이 이 만들어진 신에게 복종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에 고무된 만들어진 신은 자신을 만든 신자들에게 더욱더 철저한 복종을 요구하며, 여기에 길들어진 신자들은 그것을 참된 신앙으로 여기며 더 열심히 맹종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생각하는 신앙이 추방된 교회에서는 기독교의 옷을 입은 종교적인 망상이 지배하게 되고, 우상이 된 목회자는 신자들을 이러한 망상의 동굴로 인도하는 것을, 어용 신학자는 동굴 벽에 망상의 교리를 새기는 것을 각각 자신의 사명으로 여긴다. 망상의 동굴을 하나님 나라로 착각하기까지 한다. 그 때문에 요즘 한국 사회는 이런 종교적인 망상에 빠져 있는 교회를 향해 냉소적이다 못해 가련하다는 반응까지 보인다.”(120-121쪽)
이제 저자가 상정하는 기독교가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종교 조직에 의해 만들어진 망상의 산물이다. 자연적인 귀결은 기독교의 하나님도 망상적 존재요, 이 신을 믿는 자들도 망상을 좇는 정신병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좀 심한 논리의 비약이 있는 것 같다. 특정한 개인이나, 특수한 교회에만 나타나는 현상을 너무 일반화시키는 것이 아니냐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저자는 이러한 비판을 감수한다. 그리고 루터와 함께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고 그와 함께 보름스 법정에 서서 성서와 이성에 호소한다.
‘성서와 이성’, 이것이 이 책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열쇠다. 기독교가 천박한 종교로 전락한 배경에는 성경을 이성을 통해 읽고 이성을 신앙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저항과 복종의 준거점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저자는 중세의 교황 교회를 진단하고 비판하던 루터와 결을 같이 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기 위해 교황과 교회에 저항하며, 바벨탑처럼 높이 솟은 종교적 권위에 저항하기 위해 이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루터를 부각한다. 그리고 예수의 하나님, 곧 예수라는 하나님에게 복종하기 위해 교회가 만든 하나님에 저항하는 그의 모습을 세심하게 그린다. 이것을 보다 설득력 있게 하기 위해 루터 당시의 사람들이 용기 있게 표현하고 그린 전단지들도 소개한다. 이 전단지들은 이 책의 별미 중의 별미다. 이런 전단지들을 찾아 소개해준 저자에게 갈채를 보낸다.
저자의 통찰 중 놀라운 것 중의 하나는 저항이라는 무거운 말을 전통적인 기독교 개념으로 풀어내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회개다. 윤동주의 영향으로 회개를 자기 성찰로 이해하는 저자는 전통적인 회개의 지평을 확장한다. 많은 사람이 실패로 바라보는 루터의 내적 싸움을 종교개혁자로 가는 길에서 필수적으로 거쳐야 했던 얍복 강으로 간주하는 저자는 루터의 95개 논제의 첫 번째 외침이 ‘회개하라’는 것에 있음을 주목한다. 그리고 너무 평범하게 보이고 밋밋하게 보이는 이 말의 무게를 상기시킨다.
“어떻게 이런 종교적인 망상을 깨고, 성서의 하나님을 만나게 할 수 있을까? 동굴 신자를 어떻게 자유의 신자로 거듭나게 할 수 있을까? 우상에 대한 맹종의 멍에와 족쇄를 어떻게 하면 끊고, 예수가 주는 쉽고 가벼운 멍에를 메게 할 수 있을까? 복잡할 것 같지만, 실은 아주 간단한 것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루터가 잡았던 단어, 곧 ‘회개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회개란 저항하는 것이다. 신을 만들고자 하는 자신의 욕망에 저항하는 것, 만들어진 신을 하나님으로 섬기려 하는 어리석음에 저항하는 것, 나를 따르라는 만들어진 신의 요구에 저항하는 것, 망상의 동굴을 천국으로 여기게 하는 교리와 신학에 저항하는 것이 바로 회개이다.”(121-122쪽)
처절한 자기 성찰적 회개, 곧 저항은 떠남으로 이어진다. 이것의 외적 행위는 교회를 떠나는 것이요 교회로 돌아가는 것이다. 기독교를 떠나는 것이요 기독교로 돌아가는 것이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의 ‘떠남과 귀향’은 회개하는 자에겐, 자신에게 저항하는 자에겐 하나의 같은 과정이다. 루터도 교회를 떠나 교회로 귀향하였다. 그가 떠난 교회는 만들어진 신이 하나님 자리에 앉은 교회다. 성직자가 ‘목사-주님’이 되어 ‘예수-주님’을 추방한 교회다. 그가 귀향한 교회는 ‘복종’의 문법이 지배하는 교회가 아니라 ‘회개하라’는 소리가 아직 울려 퍼지는 광야다. 그가 귀향한 기독교는 교황을 필두로 하는 종교지도자들이 상석에 앉아 있는 ‘그리스도인-교’가 아니라 예수가 모퉁이돌이 된 ‘그리스도-교’다. 이것을 설득력 있게 그려낸 저자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건네며 책을 갈무리한다.
“저항과 복종, 그 사이에 있는 우리는 무엇에 저항하고, 무엇에 복종해야 하는가? 교회의 관행이 성경의 소리를 짓누를 때, 목사-주님의 카리스마적 설교가 성경의 진리와 부딪힐 때, ‘그리스도인-교’가 ‘그리스도-교’를 광야로 추방하고 시대정신을 지배할 때,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비오스’가 ‘우시아’를 몰아내고 교회의 상석을 지배할 때 우리는 어느 편에 서야 하는가? 교회의 거대한 탁류는 마땅히 저항해야 하는 것에 저항하지 못하고 마땅히 복종해야 하는 것에 복종하지 못함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교회의 희망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아니, 교회에 희망이 있기는 한 것일까? 어쩌면 희망을 붙잡기 위해 희망 없는 교회를 떠나야 하는 것은 아닐까? 교회를 떠나는, 아니 떠날 수밖에 없는 절망, 이것이 참된 교회로 돌아가는 길에 불을 밝히는 희망의 등대가 아닐까?
저항과 복종의 또 다른 말이 된 떠남과 귀향, 이 역설이 새로운 희망의 물꼬를 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요,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아닐까?”(259-260쪽)
책을 읽는 내내 루터의 이야기를 통해 오늘의 한국교회를 비추어주는 저자의 통찰력에 감동을 받았다. 아니, 비늘이 벗겨지고 눈이 뜨이는 것을 경험하였다. 거짓 희망이 난무하는 교회 문화에 ‘정직한 절망’을 외치는 그의 절규에 공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로 귀향하기 위해 교회를 떠나는 그의 발길에 동행하고 싶다. 이미 그 길을 내딛은 소위 ‘가나안 신자’들에게 이 책은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