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컬 시대의 철학과 문화의 해방선언 (지구인문학의 시선과 모색)
박치완 | 모시는사람들
22,500원 | 20210531 | 9791166290329
1.
연전에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으로 아카데미상 황금종려상 수상을 앞두고 미국 내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아카데미상은 ‘로컬’”이라고 밝힌 말이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됐다. 이 말은 한편으로 ‘아카데미상’의 지독한 미국중심주의에를 환기시키고 비판하는 말로 읽혔을 뿐만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는 문화라는 것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재확인하게 해 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아카데미상의 미국 중심주의’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라기보다는 미국 중심주의일 수밖에 없는 아카데미상이야말로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고 자처하고, ‘가장 세계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요구하고,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고 추종하는 경향에 대한 자각과 반성, 그리고 일침의 말로 이해함이 옳다.
한석규와 최민식이 각각 세종과 장영실로 분(粉)하여 열연한 영화 〈천문〉은 그 표제를 기준으로 할 때 중국의 역법과 다른 조선의 역법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다시 말해 ‘조선의 천문학’을 만들고자 하는 두 사람의 역정(歷程)을 그리고 있다. 이 영화의 출발점, 그리고 실제로 세종과 장영실이 추구했던 조선 천문학의 출발점은 해와 달과 별을 바라보고, 계절의 순환을 살피는 것은 조선에서나 중국에서나 동일한 사건이지만, 그 장소와 시간이 같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조선의 현실과 필요에 부응하는 학문이야말로 살아 있는 학문이고, 이것이 조선에서 살아가는 이라면 임금에서부터 천인(賤人)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추구해야 할 학문적 태도이며 학문적 지향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2020년 이후 전 세계를 강타한 이래 현재까지 지속되는 코로나19 팬데믹에서 한국을 필두로 한 동아시아 국가들이 보여준 비교적 성공적인 방역의 문화적인 배경에 대한 다각도의 분석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도 기본적으로 그리고 새삼스럽게 재확인하는 핵심은, ‘서구가 틀렸다’ ‘동양이 옳았다’는 식의 이분법이나 미러링이 아니라,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압도적인 흐름으로 강요되다시피 하는 서구적인 문화 양식이 세계 모든 인류가 따라야 할 보편타당한 기준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2.
이처럼 문화나 학문의 영역에서 ‘지리와 공간’ 그리고 ‘시간’을 살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기본 중에서도 기본이지만, 지난 1세기 (길게는 2세기) 동안 세계 역사는 지리적 구분을 지우고, 공간을 오직 하나로 일원화(세계화)하는 데만 골몰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흐름의 정점에 있는 듯이 보이는 것이 학문, 그중에서도 철학의 영역이다. ‘한국철학’이나 ‘동양철학’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철학’이라기보다는 ‘한국’철학이고 ‘동양’철학이라는 의식, 그러기에 ‘보편적인 철학’이 아니라는 의식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에서의 ‘철학’은 100여 년 전 ‘(서구적)근대화’가 시대적 흐름의 전면에 부각된 이래로 끊임없이 서구로 달려가고, 여전히 서구화에 매달리며, 한결같이 서구적인 것에 기울어지고 있다.
이 책은 이러한 경향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며, 오늘(시간) 대한민국(공간)에서, 한국사람(주체)이 철학을 한다는 것의 의미를, 철학에 관심이 있는 모든 이들과 함께, 되돌아보자고 제안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것은 분명 서구(유럽+미국)적인 것을 지향하는 것으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철학은 누구를 위해(for Whom), 어디서(Where), 언제(When), 왜(Why)라는 질문과 함께 작동되는 아주 ‘특이한 학문’”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은 “무엇을(What), 어떻게(How)”만을 문제 삼아 왔다는 것이다.
“지역-로컬에서 한국철학을 하기”의 대척점에는 “유럽을 지방화하기”라는 명제가 놓여 있다. 즉 오늘날 ‘서양철학’이라는 것이 유럽의 극히 일부 지역(프랑스, 영국, 독일과 미국 등)의 철학임에도 불구하고 그 이외의 지역(한국에서의 철학자들 포함) 사람들은 그것을 세계 보편적인 철학으로 간주하고 접근하고, 유럽(미국)인들이 자신의 철학을 세계 보편 철학으로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자처하는 것을 반성적으로, 새삼스럽게 발견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서구(유럽)철학을 지역화하고, 한국철학의 정체성을 ‘지역-학’으로서 확실히 명료하게 하여 세계 지식계에 한국철학을 문자 그대로 ‘한국철학’으로 알리고 인정받는 것이, 이 책에서 추구하는 철학-하기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결과(추구하는 목표가 아니라)이며, 한국철학을 ‘살아 있는 생명체’가 되게 하는 길이라고 본다.
다시 말하면 그동안 무비판적으로, 그리고 ‘세계화’라는 미명-폭력 하에 강제되어 왔던 세계(글로벌) → 지역(로컬)화가 아닌 지역(로컬) → 세계(글로벌)화의 관점에서 철학-하기를 궁구한다. 그 어떤 철학도, 탄생/생산의 과정에서건 수용/소비/향유의 과정에서건, 기본적으로는 지역적 특성이 반영되어 있을 수밖에 없음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그 자리에서 철학-하기를 시작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지구 시대’에 “인류공동체, 인류평화, 공공선과 사회정의의 실현을 인문학적으로 기대할 때 지녀야 하는 태도, 바로 모든 로컬의 역사, 문화, 지식의 고유성과 특수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3.
이러한 태도, 즉 로컬 지식의 회복 운동은 사실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라, 서구(유럽) 이외의 지역에서 꾸준히, 그리고 광범위하게 추구되어 왔다. 이러한, 서구중심적·획일적 세계인식에 대한 비판을 통해 획득한 지역-로컬 지식의 회복 운동은 곧 지역-로컬을 역사·문화적으로 바로 세우고, 학문적으로 독립하기 위한 사유 운동이라는 데 이의가 있다. 이는 오늘날 그 위세가 높아지고, 그런만큼 그 골이 깊어지고 그 그늘이 짙어지는 세계화 시대, 지구촌 시대에 이렇듯 역설적으로 서로 다른 로컬-지리 위의 인간은 서로 다른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 왔고, 현재에도 그렇게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정도(定道)라는 것을 재발견하는 과정이다.
결론적으로 철학,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로컬-지리적 선입견, 로컬-지리적 영향과 역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학문이라는 것,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보편 철학’이라는 망상에서 깨어나 각기 자신의 지리에 뚜렷이 서서, 지식다양성, 문화다양성이 꽃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글로벌문화’, ‘글로벌 보편지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이제 ‘Korea’라는 지역-로컬 기반의 문화와 지식의 탐구를 통해 세계무대를 지향하는 일대 ‘인식전환’이 필요한 시점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지역-로컬이 망각된 곳, ‘장소의 영혼(genius loci)’이 자본화되고 상품화된 곳, 이런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없다. 자신의 얼굴이, 이름이, 신체가 존재하지 않은 곳에서 자신의 존재 위치가 부여될 리 만무하다. 이 책은 이러한 필자의 학문적 정체성 찾기의 일환이자 실존적 물음에 대한 변론서”라는 것이다.
4.
이 책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제1부에서는 ‘지리와 철학: 글로벌 표준화에서 로컬의 특수성으로’라는 주제로 로컬/글로벌, 상대성/보편성의 경계에 선 철학과 문화가 세계화 시대에 즈음해 어떻게 재서구화(재식민화)되는 것을 방어하고 지역-로컬 고유의 정체성을 지켜낼 수 있는지의 문제를 집중 조명해 보았다.
제2부에서는 ‘문화와 지리: ‘공유’의 발판인가 ‘재식민화’의 도구인가?’라는 주제로 문화적 전환의 시대, 글로컬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문화인식론에 근거해 전통의 유일-보편문화론이 갖는 야만적 이분법에 대한 비판적 작업을 시도해 보았다.
제3부에서는 ‘서구유럽의 보편주의에 대한 제3세계의 해석과 대응’이라는 주제로 아프리카, 중남미 등에서 2000년대를 전후해 부상한 서구 유럽의 보편주의에 대한 비판적 작업과 그 대응을 종합해 보았다. 아프리카, 중남미에서 일고 있는 ‘탈식민주의 운동’, ‘해방철학 운동’은 여전히 친서구유럽적 철학에 익숙한 대한민국에서의 철학교육의 문제점이 어디에 있는지, 고유의 철학적 실천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되돌아보는 기회가 될 것이라 여겨 애써 소개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