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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영미소설
· ISBN : 9788901091914
· 쪽수 : 504쪽
책 소개
목차
1부
2부
3부
작품해설
옮긴이의 말
리뷰
책속에서
분장실 문을 닫은 그는 입술을 양쪽으로 단단하게 늘리고서 그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이런 자신의 표정에 사랑과 유머, 연민이 가득 담겨 있기를 바랐다. 즉, 몸을 숙여 아내에게 키스를 한 뒤 이렇게 말할 참이었다. “있잖아, 당신 멋졌어.” 그러나 아내의 어깨가 아주 미묘하게 움츠러드는 것을 눈치 채고는 그녀가 만지는 걸 원치 않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두 손을 어찌해야 좋을지 어정쩡해졌다. “당신 멋졌어”라는 말을 하는 게 전적으로 옳지 않겠다는 생각이 떠오른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런 말은 아량을 베푸는 태도 같거나 기껏해야 순진하고 감상적으로 보일 것이었다. 그리고 너무 표 나게 진지한 말일 거라고 생각되었다.
“글쎄.” 그래서 대신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공연이 대성공을 거두었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 안 그래?” 그러고는 쾌활하게 담배 한 개비를 입술에 갖다대고 찰칵! 소리 나는 지포 라이터를 과시하듯 휘두르며 불을 붙였다. 그는 손을 주머니에 찌르고서 구두를 내려다보며 구두 안에 갇혀서 피곤한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결국 “당신 멋졌어”라는 말이 더 나았던 것일까? 이제는 자신이 뱉은 말만 빼면 그 어떤 말을 했어도 더 나았으리라는 기분이 들었다. - 26쪽 중에서
“아, 저 집은 아주 훌륭해요.” 기빙스 부인이 소리쳤다. 그리고 차고 진입로로 올라가서 주위를 둘러보려고 차에서 내렸을 때는 기빙스 부인의 웃음소리가 아부 섞인 칭찬에 스며들어 따뜻한 보금자리처럼 그들을 감싸 안았다. 두 사람이 소곤소곤 의논하면서 아무 치장도 장식도 없는 집안의 마룻바닥을 걷고 있는 동안 기빙스 부인은 그들 근처를 맴돌면서 안심시키고 보호해 주었다. 이 집이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그들의 소파는 여기에 놓고 큼직한 탁자는 저기에 두면 되리라. 그들이 가진 책들로 견고한 벽을 세우면 거실 전망창의 저주 같은 건 떨쳐버릴 수 있으리라. 가구를 드문드문 솜씨 좋게 배치하면 거실이 지나치게 규격화된 교외 주택가의 모습을 중화시켜주리라.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니, 바로 이 집의 균형 잡인 모습이 거부할 수 없는 매력처럼 마음을 끌어당겼다. 문손잡이들의 촉감과 가벼운 무게를 즐기며 그들은 이곳을 보금자리로 느끼는 환상에 젖을 수 있었다. 이 집은 분명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점점 부담스럽게 쌓여가고 있는 그들 삶의 무질서가 어쩌면 제대로 분류, 정리될지도 몰랐다. 그래서 이 방들에 꼭 맞게, 이 나무들 사이에서 삶이 잘 정돈될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러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한들 무슨 상관이 있으랴? 이처럼 넓고 밝고 깨끗하고 조용한 집에 살면서 두려워할 사람이 있을까? - 48~49쪽 중에서
“안녕!” 그들은 서로서로 큰 소리로 인사를 나누었다.
“안녕!…….” “안녕!…….”
기쁨을 실은 이 한마디가 몰려드는 땅거미 사이로 날아올라 휠러 부부가 사는 집 부엌문 어귀에서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이것은 저녁의 오락 시간을 알리는 전통적인 인사말이었다. 거실에 들어오면 우선 술을 홀짝였다. 술잔 테두리의 언 부분에 입술이 닿으면 인상을 살짝 찡그리고는 서로를 칭찬하고 독려하는 순간을 위해 가깝게 당겨 앉았다. 그다음에는 절제된 태도를 벗어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다들 다양한 자세로 풀어지는 것이다.
밀리 캠벨은 신고 있는 구두를 벗어버리고는 꿈틀거리며 소파 쿠션 깊숙이 몸을 감추었다. 발목은 엉덩이 아래에 가지런히 놓였고 한껏 고양된 얼굴은 싹싹하고 흥겨운 미소로 주름이 잡혔다. 세상에서 가장 어여쁜 여자는 아닐지라도 귀엽고 재바르며 함께하면 재미도 있을 그런 얼굴이었다.
그녀 곁에서 프랭크는 소파에 등을 대고 목덜미까지 미끄러지듯 내려가 얼굴을 두 다리 사이에 파묻었다. 눈은 이미 대화를 시작하려고 기민하게 움직였다. 얇은 입술이 벌써 위트 있게 돌돌 말렸다.
건장하고 기댈 만하며 꾸준히 이 모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셰프는 살집 좋은 무릎을 쫙 벌리고 억센 손가락으로 매고 있던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 목구멍에서 폭소가 자유롭게 터져 나오도록 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으로 자리를 잡은 에이프릴은 무심한 듯 우아한 몸짓으로 캔버스 의자에 단정히 앉았다. 고개를 의자 뒤로 젖히고는 담배 연기를 슬프고 귀족적인 소용돌이 모양으로 만들어 천장으로 불었다. 다들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 - 87~88쪽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