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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일본사 > 일본사 일반
· ISBN : 9788925553160
· 쪽수 : 394쪽
· 출판일 : 2014-08-29
책 소개
목차
#추천의 글 | 서문
1장 일본 문화의 시작
일본인은 대륙에서 건너왔나? | 기나긴 죠몬 시대, 정착이 시작되다 | 토우는 깨기 위해 만들었다! | 죠몬인은 미식가? | 고대인이 사용한 도구는? | 농경 발달이 다툼을 일으켰다? | 야요이의 우아한 생활 | 규슈냐? 야마토냐? | 신화 속 원시 일본은? | 지역마다 다른 무덤 형태
column
산나이 마루야마 유적으로 바뀐 죠몬의 풍경 | 호류사의 건축기법은 언제부터 있었나? | 이즈모에 정말 대왕조가 있었을까?
2장 율령국가의 탄생
고분이 전해주는 시대 변화 | 귀족적 불교 문화에서 일본 독자 문화로 | 불교가 중앙집권화를 촉진했다? | 쇼토쿠 태자가 꿈꾼 국가 | 다이카 개신이 시행된 이유 | 율령국가의 구조 | ‘진신의 난’은 왜 일어났나? | 토지 사유는 언제부터? | 무사에게서 농민 손으로 | 일본과 중국은 활발히 교류했다 |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편찬한 까닭은? | 처절한 권력투쟁의 시대 | 간무 천황이 수도를 옮긴 까닭은? | 귀족을 떨게 한 최초의 무사 반란 | 후지와라노 미치나가가 번영한 비밀은? | 원정은 누가 지탱했나? | 불륜이 초래한 귀족 사회 붕괴 | 타이라씨 정권 탄생의 비밀은? | 타이라씨가 멸망한 원인은? | 장려한 히라이즈미 문화가 싹튼 배경은?
column
가장 오래된 문자는? | 일본 승마법은 뿌리는? | 오노노 이모코가 유형당할 뻔한 이유는? | 일본에서는 모르는 간진 화상의 공적 | 후지와라쿄는 책을 보고 만든 대실패작?
3장 무사가 주도하는 시대
가마쿠라 바쿠후는 언제 탄생했나? | 미나모토씨에게서 싯켄 호조씨에게로 | 공가 중심 문화에서 무사의 히가시야마 문화로 | 염불로 구원받을 수 있다? | 가마쿠라 시대에 개화한 ‘선’ | 도다이사 재건에 사용된 건축양식은? | 조각의 황금기를 맞이하다 | 고토바 상황의 고집이 무사정권을 세웠다? | 무사의, 무사를 위한 법 | 처음 경험한 외세 ‘원구’ | 가마쿠라 바쿠후는 왜 무너졌나? | 바쿠후를 타도한 이들은? | 2년 만에 끝난 겐무 신정 | 남북조 동란이 60년이나 지속된 이유는? | 기타야마 문화를 낳은 아시카가 요시미츠 | 검술이 뛰어났던 아시카가 요시테루 | 간토인의 바람은? | 잇키의 배경이 된 소손 시스템 | 서민의 저력을 드러낸 쓰치잇키 | 왜구의 정체는? | 자유도시 ‘사카이’가 번영한 까닭은? | 일본에 편입된 독립국 ‘류큐’ | 난을 부른 어머니의 맹목적인 아들 사랑 | 차는 ‘투차’로 보급되었다! | 가와나카지마 결전의 승자는? | 군사의 본업은? | 성은 왜 지금과 같이 되었을까? |
column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죽음의 진실 | 중세는 무사의 전성기 | 싯켄 호조 일가가 집단 자살한 저택의 흔적 | 남북조 통일 후에도 교토로 돌아가지 않은 천황 | 다케다 신켄이 쓴 연애편지의 상대는?
4장 일본의 통일과 태평 시대
오다 노부나가라는 인간의 혁신성 | 히데요시가 단기간에 통일한 비결은? | 그리스도교 300년 고난의 길 | 세키가하라 전투는 ‘운’에 좌우되었다? | 이에야스는 쇼군이 될 수 없다? | 이에야스가 자살하려 했다고? | 바쿠후가 힘을 유지한 방법은? | 쇄국 아닌 쇄국제도의 모호함 | 문화 담당자는 무사에서 조닌으로 | 풍속화가 샤라쿠의 정체는? | 인기 작가도 글만 써서 먹고살 수 없다? | 부침이 격심한 바쿠후의 재정 | 세 차례 개혁의 성과는? | 바쿠후를 확립한 초기 3대 쇼군 | 명군 이에노부와 개성파 쇼군 요시무네 | 정치를 혼란시킨 이에나리, 한 시대를 마감한 요시노부 | 미토 고몬의 놀랄 만한 실상 | 츠나요시가 만든 천하의 악법은? | 왜 복수가 성행했을까? | 오이에 소동으로 유명한 ‘구로다 소동’ | 에도의 도덕, 유학이란? | 에도 중기에 등장한 ‘일본’의 새로운 학문 | 난학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 홋카이도만의 역사가 있다!
column
오다 노부나가가 유부녀에게 편지를? | 전국 시대에 유행한 공중변소 | 3대 쇼군 이에미츠의 친부모는 누구? | 방화범과 도적 수사관 하세가와 헤이조의 실상 | 에도 시대에도 생활협동조합이 있었다? | 신센구미 탈주자 중 곤도 이사무의 아들이 있다! | 능력을 키워주는 가츠 카이슈의 인간 관리
5장 근대화하는 일본
바쿠후 말기 속속 들이닥친 외국 선박 | 미일수호통상조약은 왜 불평등한가? | 대외무역이 바쿠후 붕괴를 앞당겼다? | 바쿠후 말기 사상은 어떻게 변했나? | 관군은 어떻게 전국 평정을 추진했나? | 외국령이 될 뻔한 오가사와라 제도 | 폐번치현은 정부의 과감한 책략? | 지조를 개정한 목적은? | 불평사족의 난은 왜 일어났나? | 자유민권운동이 크게 유행한 이유는? | 일본 정당정치는 3당으로 시작했다 | 전전 정당은 대정익찬회로! | 마츠카타 디플레이션이 초래한 ‘격화’ 사건 | 언론과 사상은 항상 탄압받았다 | 불평등조약 개정에 반세기가 넘게 걸렸다! | 조금씩 획득한 선거권 | 헌법에 숨겨진 비밀은? | 청일·러일 전쟁 상대는 모두 러시아 | 조선은 어떻게 침탈되었나? | 의무교육이 16개월? | 어부지리로 세계대국이 된 일본 | 정당이 신뢰를 잃은 결과는? | 왜 태평양 전쟁에 돌입했나? | GHQ의 교묘한 일본 통치법 | 일본 재건의 2대 방침은? | 몇 번이고 부활한 일본 경제
column
주일총영사 해리스는 일본에서 낙원을 보았다 | 지치부 사건의 지도자, 이노우에 덴조의 도망자 인생 | 〈너만은 죽지 않기를〉의 주인공은 어떻게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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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책속에서
# 일본인은 처음부터 혼혈이었다?
현 일본인은 인종적으로는 고(古)몽골로이드에 속한다. 아직 일본 열도가 대륙이나 동남아시아와 연결되어 있던 홍적세(200만∼1만 년 전)에 한반도와 화남 지역, 인도차이나 반도나 타이완, 연해주나 시베리아 등에서 일본으로 이주해 피가 섞이면서 형성된 것이 일본인의 원형(죠몬인)이라고 할 수 있다.
야요이 시대에 접어들면서 한반도에서 이주자가 다수 건너와 죠몬인을 변경으로 몰아내고 주류가 되었다. 그래서 열도는 옛날부터 살던 죠몬인과 새로운 야요이인이 공존하는 이중구조 사회가 되었다는 것이 현재 유력한 설이다. 즉 현대 일본인은 죠몬인과 야요이인의 혼혈이라고 볼 수 있다.
# 장원제도라는 새로운 토지 시스템
간전영년사재법으로 재력을 가진 사원과 귀족은 개척과 개간을 시작했다. 이들이 개간한 토지를 초기 장원이라고 한다. 그러나 10세기 이후 초기 장원은 쇠퇴하고 개발 영주(유력 농민)가 작인(농민)과 하인(농노)을 부려 토지를 개척하고 이를 귀족과 사원에 기부하는 기진지(寄進地)계 장원이 주류가 되었다. 물론 기진은 명목상이며 실제 소유권은 개발 영주에게 있었다. 그들은 기진으로 귀족과 사원을 영가(領家)·본가로 받들며 그 권위를 이용해 국사(國司)의 압력과 조세를 피하려 했다.
참고로 국사의 장원 출입을 거부할 권리를 ‘불입권(不入權)’, 조세 면제의 권리를 ‘불수권(不輸權)’이라 했다. 이를 통해 장원은 국가 지배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
# 눈 깜짝할 사이에 수도를 옮기다
고닌 천황의 뒤를 이은 간무 천황은 7대 74년에 걸쳐 수도였던 헤이조쿄를 폐하고 야마시로쿠니(山背國)의 나가오카(長岡, 현재 교토 부근)에 새 도시를 만들어 수도를 옮겼다. 천도는 갑작스럽게 진행되었다. 784년 5월에 천도할 뜻을 밝히고 같은 해 11월 나가오카로 옮겨버렸다. 간무 천황은 왜 이렇게 천도를 서둘렀을까.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① 2대 전인 쇼토쿠 천황 시대부터 도쿄를 필두로 불교 세력이 정치에 강하게 개입하자 불교의 영향력을 끊어버리기 위해서였다. ② 간무 천황은 당시까지 천황을 계속 배출한 덴무 천황계가 아닌 덴지 천황계였기 때문에 덴무 천황계에 대항할 지역을 원했다. ③ 후지와라씨 일족과 같은 옛 귀족 세력을 누르고 천황의 친정을 실현하려 했다. ④ 에미시(蝦夷)를 정벌하기 위해 병사와 물자의 보급이 편리한 수륙 요충지로 도읍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