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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32019529
· 쪽수 : 268쪽
목차
비틀스의 다섯번째 멤버
이것은 개가 아니다
《 》
주관식 생존문제
하멜른
너희들
다 같이 돌자 동네 한 바퀴, 바둑이도?
우리 동네 꽃도령
구
해설 - 착시를 부르는 얼굴_허윤진
작가의 말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나는 연필을 쥐고 창밖을 내다본다. 창 저편은 캄캄하다. 허공이다. 한 발자국만 내딛으면 꿈과 삶의 경계는 지워진다. 얼굴 없는 여자들도 나와 함께 깨끗하게 사라질 것이다.
십자가는 오늘도 불을 밝히고 있다. 방바닥에 붉은 빛이 고여 있다. 수현이는 여덟 해를 살았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그 애는 언제까지나 여덟 살 어린아이로 남아 있다. 그 애의 생은 거기서 멈췄다. 초록 원피스를 입은 동생은 자라지도 늙지도 않는다. 내가 만난 젊고 늙은 아홉 여자는 웃고 슬퍼하며 살아가고 있다. 어디선가 생은 이어지고 있는 것만 같다. 나는 그 애의 생을 끊임없이 잇대주고 싶었다.
나는 공책을 꾹꾹 눌러 펼친다. 잊지 말자. 잊지 않기 위해서는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빠짐없이 적어두어야 한다. 이야기 속 여자들은 점점 자라나고, 모습을 달리한다. 내 앞에 백지가 있다. 첫 줄에 ‘9’라고 썼다. 손에 연필을 꼭 쥔다. 나는 한 줄 한 줄 아홉번째 여자에 대해 써내려간다.
틀림없다, 그 여자다.
나는 필사적으로 찾아 헤매던 그 여자와 우연히 마주쳤다. 살아생전 한 번쯤은 만날 거라고 믿고 싶었다.
-「구」 중에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아버지가 레고 블록을 보냈다. 우주기지와 스위트 홈, 두 세트였다. 가지고 놀다보니, 섞였다. 우주 비행사들은 영국제 찻잔을 들었고, 우주기지에는 삼각뿔 나무가 섰다. 우듬지에 문어 괴물과 종달새가 둥우리를 틀었다. 조립식 주택의 앞마당에는 우주선 발사대가 섰는데, 나는 모가지가 잘 빠지는 레고 인형들을 거기 태워 벽에 던졌다. 잘도 박살났다. 주섬주섬 주워 이리저리 끼워 오후의 티 파티로 부활시키고자 했다. 조각들이 턱없이 모자랐다. 레고 인간들은 침묵했다. 그린 듯한 미소만 지었다. 나야 막막했다. 그럴싸한 뭔가를 만들겠다는 생각은 쉽사리 버림받았다. 다행히 뒤죽박죽은 나의 장기(長技)였다.
불탄 집, 잿더미를 뒤져 쓸 만한 것을 찾았다. 못만 한 줌 나왔다. 몹쓸 못이었다. 아무 데나 박아댔다. 흰 벽의 검은 대가리들, 종일 종알거렸다. 내 벽의 얇음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