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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문학의 이해 > 비평론
· ISBN : 9788932044286
· 쪽수 : 464쪽
· 출판일 : 2025-08-18
책 소개
그 문학 곁에 선 비평
“지금 여기”의 문학을 말하는 방법
문학평론가 이소의 첫 비평집
비평가는 실험실에서도 그 경계를 어슬렁거리는 존재여야 할 것이다. 내부자이자 외부자로서, 끊임없이 거리를 조정하고 시점을 전환하는 공범이자 타자로서 존재해야 할 것이다.―「마녀들의 주방 혹은 실험실에서」(p. 194)에서
2020년 등단 이후 꾸준히 사회적 사건을 재현한 문학을 연구해온 문학평론가 이소의 첫 비평집 『부재하거나 사라졌거나 영원한』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저자의 박사논문이자 202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작인 「‘남성 성장소설’을 넘어서―‘위안부’ 피해자를 재현한다는 것」에서 시작된 문학의 역사적 증언은 세월호, 5·18의 광주, 4·3의 제주, 이태원 그리고 아우슈비츠까지 가닿는다. 저자는 모든 문학이 역사의 재현이자 총체임을, 증언과 기록이야말로 오늘의 문학이 서야 할 자리임을 역설한다. 그렇게 그 길 위에, 이소의 비평이 함께한다.
비평, 우리의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일
그렇다면 오늘날 역사는 어떻게 서사화되고 있는가. “진보나 혁명 같은 거대 서사가 소멸한 후” “무한한 자료를 검색하고 소유할 수 있게 된 이 세계에서” 역사는 흡사 박물관처럼 아카이빙된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다. 저자는 이 미세하게 “파편화된” 역사적 기록을 “문학적 텍스트로 변환하는 작업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문학주의자”라고 말한다. 문학의 “큐레토리얼”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위안부’ 피해자를 재현한 소설인 윤정모의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와 임철우의 『이별하는 골짜기』를 분석한 평론에서 보여지듯 이소는 (작가가 선택한) 역사적 사건의 교차점에 서 있는 문학, 역사적 증언으로서의 문학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는 역사 속 개인의 트라우마가, 그 외상의 심연이 너무 깊어 무언가를 쓸 수 없는 이유가 쓰는 이유보다 더 중요하다면 그 안에서 문학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에 집중한다.
이제 우리 시대에 ‘역사’라는 것이 바라는 바도 가야 할 바도 모두 잃은 채 기억과 증언과 기록의 합집합을 이르는 말이 되어버렸다면, 역사와 가장 유사한 속성을 지닌 것은 ‘외상’이라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외상의 본질이 다름 아닌 ‘말할 수 없음’이라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역사를 외상처럼 인식할 때 그것을 서사화하려는 시도는 흡사 뮤지엄이 사물의 배치와 배열을 통해 과거를 펼쳐놓는 것처럼 공간과 사물에 기대어 이루어지기 쉬울 것이다.―「적산가옥」(p. 42)에서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었으며, 그동안 발표했던 서른한 편의 글을 엮었다. 그는 책 속에서 ‘공간’과 ‘사물’의 데카르트좌표를 그린다. 그리고 그 좌표 안에 문학작품들을 배치한다.
1부 ‘큐레토리얼―좌표, 배치, 연결’에서는 문학비평의 좌표를 제시한다. 역사 속에서 문학비평의 자리를 톺아보고, 그 방대한 역사적 아카이브 속에서 평론가는 이제 ‘지식인’이자 ‘작가’가 아닌 ‘큐레이터’로서 존재하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고 전한다. 마치 전시 기획과 더불어 미술관의 행정을 운영하는 미술계 큐레이터처럼 지금의 젊은 문학평론가에게도 이러한 역할이 요구된다고 보는 저자는, 젊은 문학평론가들이 작가들과 함께 아카이브를 구축하거나 모큐멘터리를 제작하는 시도 역시 이러한 맥락이라고 짚는다.
2부 ‘적대와 품위―사건, 정치, 페미니즘’에서는 한국 현대사와 문학사에 영향을 준 사건들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려나간 여러 작품에 대해 비평한다. 저자는 “역사는 트라우마적 과거와 신체화된 기억을 기록과 사물로 제시한다”라고 보고, 이를 기록하는 문학을 고통의 총체이자 재현, 증언으로 이해한다. 예컨대 「증언의 거처」에서는 김숨의 『L의 운동화』를 분석하며 ‘신발’이라는 사물에 주목하며, 작품 속 신발은 “이한열의 운동화를 비롯한 미선이·효순이의 신발, 아우슈비츠의 신발 등 역사적 죽음을 증언하는 유물들과 제주 4·3 사건 피해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등 사라져가는 생존자들의” 실존적 증언임을 설파한다.
3부 ‘경도와 위도’에는 여러 작가론과 작품 비평을 묶었다. 지구 좌표의 세로축과 가로축을 의미하는 경도와 위도처럼 현재 한국문학계에 담론을 형성하는 작품들을 꼽아 그만의 좌표에 위치시켰다. 특히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을 분석하며, ‘불안정성’을 가로축, ‘정치력’을 세로축으로 설정해, 등장인물들이 위치한 사회학적 영토를 시각화한 글이 인상적이다. 네 개의 영역―변화 없이 체제에 안착한 시스템 영역, 취미를 통해 일상의 권태를 완화하는 취미의 영역, 불안정하지만 연대 의지가 약한 실존적 영역, 그리고 불안정성과 정치력이 모두 높은 정치적 영역―으로 구분된 좌표계를 통한 이 분석은 각 영역 간 전환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냄과 동시에, 작가가 낙관도 냉소도 아닌 현실 감각 속에서 ‘아주 작은 승산’을 포착하고 있음을 논리적으로 분석해낸다. 이처럼 저자는 작품의 시공간을 정리하고 배치해 좌표계를 만들고, 그 좌표계로 지도를 그려보면서 전체를 조망한다. 이 과정에서 소설은 단순한 이야기 너머, 독자가 위치를 자문하게 만드는 사유의 장으로 확장된다.
분석과 관찰로 구축한 비평 좌표
내 도구 중 하나는 좌표계. 내게는 소설을 읽을 때 머릿속으로 데카르트좌표 하나를 그려보는 버릇이 있다. x축과 y축으로 좌표평면을 만들고 그 위에 소설의 시선에 따라 점을 찍어본다. 점들의 연결을 살펴보면 소설이 위치하는 범위나 운동성 같은 것을 짐작해볼 수 있다.―「주술과 언어의 유물론」(p. 359)에서
평론가 이소에게 ‘데카르트좌표’는 비평적 도구로 활용된다. 실제로 학부 시절 ‘이과생’이기도 했던 그는 “분석과 합성이 이루어지는 실험실과 무관한 장소에서 비평을 한다는 것은, 마치 관측 장소가 변해도 관측 결과가 일정하길 바라는 고전물리학의 세계처럼 단조”롭다고 말한다. 문학은 그의 시공간적 좌표계에서, 스펙트럼 안에서, 사고실험으로, 벤다이어그램으로 분석되며 새로운 체계를 얻는다.
문학작품과 병치·배열된 과학의 도구와 언어는 그의 고유한 도구로 기능한다. 이를 토대로 이루어진 분석적·과학적인 비평은 ‘고효율 현미경’이 되어 문학작품 속에서 ‘데이터베이스’를 찾아내고 분류해 관찰할 수 있게 한다. 그렇게 포착된 작품들은 저자의 데카르트좌표계 위에 놓여 별자리처럼 빛난다. 이소의 첫 비평집 『부재하거나 사라졌거나 영원한』 역시 그 별자리를 따라가는 문학비평의 새로운 길잡이별이자 좌표계가 될 것이다.
목차
1부 큐레토리얼―좌표, 배치, 연결
부재하거나 사라졌거나 영원한―역사와 사물의 큐레이터
적산가옥
종언 앞에서 부활하기, 멸종 앞에서 사물 되기―21세기 문학비평의 지형도
비평의 몰락을 한탄하지 않는 방법
나의 아름다운 사물들―신유물론과 비평에 관하여
버티고 움직이고 미끄러지면서―최근 한국소설이 그리는 ‘집’의 좌표평면
비인간을 사랑하기로 했습니다―최근 소설 속 비인간 존재들에 관하여
세대와 시대―최근 소설의 세대 재현에 관하여
2부 적대와 품위―사건, 정치, 페미니즘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세월호 이후의 문학 1
영원히 숲에 머무를 수 없다면―세월호 이후의 문학 2
테이블 위에서―세월호 이후의 문학 3
마녀들의 주방 혹은 실험실에서
새롭지도 훌륭하지도 않게―형식주의자의 페미니즘
‘남성 성장소설’을 넘어서―‘위안부’ 피해자를 재현한다는 것
죄의식의 남성성, 해원의 여성성―임철우론
증언의 거처―김숨론
곁, 정류, 앎―고통과 문학에 관하여
제주에서 보낸 한철―김금희, 조해진, 한강의 장편소설과 ‘정치적인 것’에 대하여
3부 경도와 위도
일요일 오후를 견디는 법―성혜령, 위수정
그러므로 다시 이야기를―김기태, 정선임
잃어버린 허구를 찾아서―김성중, 정영수
전자 시대의 교향곡―신종원의 『전자 시대의 아리아』
주술과 언어의 유물론―신종원의 『고스트 프리퀀시』
소거되지도 승격되지도 않는―서수진의 『유진과 데이브』
그날 이후, 우리는―장희원의 『우리의 환대』
마음과 구조―김혜진의 『축복을 비는 마음』
키치 대신 미래를 드립니다―김멜라론
다만, 아주 작은 승산―김기태론
크레용과 샤프펜슬―한강의 『노랑무늬영원』
중력과 미래―인아영의 『진창과 별』
그렇게 열린 틈으로 무엇이―이광호의 『작별의 리듬』
나가며―번역의 시간
저자소개
책속에서
우리가 이 세계에 비평적 개입과 대화를 시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아카이브를 대상으로 큐레토리얼 접근을 하는 것뿐이다. 우리는 엄청난 정보와 자본을 토대로 구성된 정교한 알고리즘에 따라 우리의 입맛에 맞게 제공된 ‘재생 목록’을 끊임없이 재생하며 살아갈 수도 있고, 비판과 개입을 포기하지 않고 큐레토리얼 작업을 통해 ‘나의 아카이브’, 더 나아가 ‘우리의 아카이브’를 구축하며 살아갈 수도 있다.
―「부재하거나 사라졌거나 영원한」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은 온전히 우리를 위해 마련되었거나 우리가 성취한 것이 아니라, 얼마만큼은 족쇄처럼 우리를 묶어버렸고 또 얼마만큼은 우리가 갈취한 것이니, 물려받은 자산이자 부채로서 우리 삶을 둘러싼 모든 물질적·비물질적 방식은 적산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식민지 시대의 유산만이 아니라, 그것을 근대라 부르든 자본주의라 부르든 지금 우리 손에 받아 쥐어 가꾸며 살아가는 모든 것이 적산으로부터 출발했다. 무언가를 청산하는 일의 어려움이 여기 있을 것이다.
―「적산가옥」
‘집’은 내가 사회의 규범성을 습득하고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도록 많은 것을 일러주었고, 나는 그곳에 빼곡히 각인된 것들을 해독하며 내가 이 사회에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의 범위와 얻지 못하는 것의 범위를 자연스럽게 알아갔다. 이것을 계급이나 정체성이라 말할 수도 있고, 동시에 그것들을 모두 초과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언제나 ‘집’은 이상적인 ‘집’을 상상하고 구성하는 사유, ‘집’에서 머무르거나 들어가고 나가는 행위, ‘집’과 ‘집이 아닌 곳’이 맺는 관계까지 포함하여 만들어지는 것이니까.
―「버티고 움직이고 미끄러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