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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기독교(개신교) > 기독교(개신교) 선교/전도
· ISBN : 9788932814148
· 쪽수 : 756쪽
· 출판일 : 2015-06-11
책 소개
목차
언더우드
개정판 역자 서문
역자 서문
서문
1. 혈통과 교육
2. 선교사 훈련
3. 중요한 시작
4. 기억할 만한 여행
5. 문법학자이자 사전편찬자
6. 바쁜 휴가
7. 다시 한국의 집으로
8. 한국에서의 운명의 날들
9. 순회 선교사
10. 옹호자-화평케 하는 자-대사
11. 넓어지는 강
12. 어둠과 빛
13. 일본의 보호국
14. 연합의 전조
15. 열성적인 지방여행
16. 유럽에서의 휴식
17. 미국에서의 한국 홍보 활동
18. 선교지의 분할
19. 심각한 부상
20. 축복의 소나기
21. 미국 대표단
22. 1914-1915년
23. “여정을 마치고 본향으로”
연보
색인
아펜젤러
개정판 역자 서문
서문
머리말
1. 하나님의 한국-찬란한 아침
2. 인간의 한국-실제 삶
3. 은자의 나라, 문이 열리다
4. 감리교와 아펜젤러
5. 그리스도의 군병 훈련
6. 한국에 대한 관심
7. 위대한 결단
8. 항해와 첫인상
9. 한국의 집
10. 묵은 땅에 뿌린 새 씨앗
11. 어린아이의 힘
12. 말을 타고-한국의 옛 도읍들
13. 북쪽에서-나루터 도시 평양
14. 재미있고 유쾌한 가정생활
15. 복음이라는 보석을 바라보며
16. 문자의 독점
17. 한국어를 익히다
18. 전염병의 시기
19. 학교와 교회
20. 첫 번째 휴가-고국에서
21. 문명의 개척자
22. 상상의 세계
23. 복음의 동역자들
24. 두 번째 고국 방문
25. 타인의 생명을 구하다
26. 추수의 계절
27. 성령의 바람
부록1_ 아펜젤러 설교문
부록2_ 회고록
연보
색인
책속에서
<언더우드> 책 속으로
올해 2015년은 복음 선교사 아펜젤러·언더우드가 이 땅에 온 지 꼭 130주년이 되는 해다. 아펜젤러는 미국 북감리교의 파송을 받았고 언더우드는 미국 북장로교의 파송을 받았다. 이들에 앞서 만주를 통해 성경이 번역·보급되어 개종자가 일어나고 있었고, 바로 그 시기에 한국은 이들의 복음에 접목되었다. 그 뒤 한국교회는 세계 선교사상 유례없는 성장과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초대 선교사인 그들의 헌신적인 노력에 다시 한 번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의 주인공인 언더우드에 대해서는 그동안 수많은 논문들과 한두 권의 저술 및 자료집이 나왔다. 그중 이광린 교수의 「초대 언더우드 선교사의 생애」(연세대출판부, 1991)가 한국인이 언더우드에 대해 쓴 최초의 저서다. 그 뒤 옥성득 교수가 편역한 「언더우드 자료집」(전 5권)은 언더우드 연구에 획기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이 같은 자료집의 간행에도 불구하고 언더우드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부족한 편이다. 언더우드 연구는 단순히 그의 생애와 업적, 신학과 사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한국 근대사에 미친영향까지 고려하여 좀더 거시적이고 종합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아직도 그 같은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판단이 이 번역서를 다시 간행토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_<언더우드> “개정판 역자 서문”에서
이 글을 서술해 가는 동안 필자에게 점점 더 명확해졌던 사실은, 언더우드의 전 생애 가운데 하나의 두드러진 특징, 즉 하나의 지배적인 성격이 바로 사랑이라는 점이었다. 이것은 교파나 인종이나 시간이나 장소와 같은 좁은 테두리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 무한히 넘쳐흐르는 위대한 사랑이었다. 수많은 심령들이 그에게 다가와 사랑의 마음으로 인격적인 헌신을 한 것도, 또 그가 전 생애에 걸쳐 “타오르는 횃불”(a torch of fire)이라 불리면서 일관되게 살아가게 한 것도 그의 이러한 사랑이었다. 그는 믿음과 소망의 놀라운 은사를 받았지만, 사랑이야말로 그중에서 제일가는 은사요 그의 존재의 본질이었다. 그의 성품과 선교 경험에 대한 연구가 독자들에게 약간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 필자의 목적은 달성되는 셈이다.
_<언더우드> “서문” 에서
이런 상황에서 교회가 선교를 위한 아무런 준비 활동도 없이 1년여를 보냈다는 생각에 격동하여 저는 한국에 갈 사람을 찾는 일에 착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저 자신은 인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믿고 있었고, 이런 신념 아래 그곳에 갈 특별한 준비를 하기 위해 1년 동안 의학 공부를 해 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누군가 기꺼이 한국에 갈 사람이 달리 있으리라고 확신했습니다. 저는 가능한 한 서둘러 한국에 갈 사람을 물색해 보았지만, 한 사람도 발견하지 못한 채 1년이 흐르고 말았습니다.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려는 교회는 한 군데도 없었으며, 외국 선교사업의 지도자들도 한국에 들어가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왜 너 자신이 가지 않느냐?’ 이런 메시지가 제 가슴에 울려온 것은 바로 이때였습니다.
_<언더우드> 1장 “혈통과 교육”에서
고아들을 위한 집과 학교가 문을 연 것은 1886년 초였다. 이 시점에서 언더우드가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친구인 헐버트에게 언젠가는 한국에 대학교와 신학교를 설립하겠다는 그의 희망을 털어놓았다는 것은 기록해 둘 만하다. 이것은 그가 언제나 장기적인 안목을 지녔다는 점을 말해 준다. 그 고아원은 국왕 폐하의 호의에 넘치는 승인을 받았고, 몇 년 후에는 ‘그리스도인 일꾼들을 위한 존 D. 웰즈 아카데미’(the John D. Wells Academy for Christian Workers; 儆信學校)가 되었다. 한국인 책임자가 있긴 했지만, 처음 한두 해 동안은 언더우드가 실제 고아원을 관리했고, 또 그 학교의 여러 학급을 가르쳤다. 당시 ‘김규식’(Kim Kiu Silk) 혹은 ‘변갑이’(Pon Ga-be)라 불리던 어린 존(John)을 맡게 된 것도 이 학교와 관련하여 이루어진 일이었다.
_<언더우드> 2장 “선교사 훈련”에서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서재 책상에서 두 복음서를 훔쳐보게 되었다.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이었다.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낄 새도 없이 급히 그 두 권을 넓은 소매 속에 넣은 다음, 훔친 보물을 들고 집으로 달려왔다.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듯이, 우리의 친구 노 씨는 희열을 느끼며 금지된 문헌을 독파했다. 그는 이 책의 놀라운 매력에 사로잡혔다. 이것은 편견에 사로잡힌 그의 마음에도 그저 아름다운 것일 뿐 아니라 진리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밤새 그 책을 읽고 아침에는 그것이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완전히 확신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용감하게도 복음이 ‘좋고 웅대하며’, 죽든 살든 믿음을 갖고 싶다고 언더우드의 서재에서 공개적으로 고백했다.
_<언더우드> 2장 “선교사 훈련”에서
여기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이 여행에서 언더우드가 세례를 준 유일한 사람들이었으나, 이 숫자는 그 이전이나 그 이후 얼마 동안 그가 세례를 준 사람을 다 합친 숫자보다 많았다. 다른 선교지에서 나타난 결과와 비교해 볼 때, 우리의 짧은 선교 역사의 시점에서 이 숫자는 놀라운 것이었다. 훗날 소문이 퍼지면서 이 숫자는 과장되어, 언더우드는 숫자를 늘리기 위해 잘 알지도 못하는 소위 새신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무턱대고 세례를 주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실은 그와 정반대로 그는 매우 양심적이어서 이들을 심사하는 데 괴로움을 느낄 정도로 심사숙고했다. 몇 사람들은 1년 넘도록 교육을 받으면서 오랫동안 준비해 왔다는 것을 언더우드도 알고 있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세례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서 씨가 3년 전부터 보고해 온 이들이었다.
_<언더우드> 4장 “기억할 만한 여행”에서
그러던 얼마 후 빛이 다가와, 언더우드는 그 자신이 잘못된 방식으로 일해 왔음을 알게 되었다. 중국과 초기 한국의 종교를 탐구하는 동안에 옛 한국의 일부였던 고구려 왕국에서는 하나님이라 불리는 유일한 신만을 섬겼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단어는 설명적인 용어로, 크고 ‘유일한’ 한 분(only One)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제까지 ‘하나님’이란 용어 사용을 한국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바에 대해 그가 발견했던 것과는 달랐다. 그러나 고구려 시대의 그 의미가 원래의 의미이고 지금의 의미는 거기서 파생된 것임이 틀림없었으므로, 언더우드는 이 본래의 의미에 담긴 속성을 가지고 이 말이 사용되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사용되면, 그 본래의 의미가 한국인들의 가슴속에 쉽게 살아날 것이었다. 새로운 발견을 통한 이 빛 속에서 이전에는 자신이 거부했던 그 말을 사용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고 생각되었다.
_<언더우드> 7장 “다시 한국의 집으로”에서
이렇게 모금을 권유하는 동안 언더우드는, 기독교는 외국 종교인데 왜 외국인들이 그 경비를 대지 않는지 알 수 없다는 한국인들의 반론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만일 기독교를 전파하는 데에 외국 돈을 사용한다면, 기독교는 계속 외국 종교로 불릴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여러분의 힘으로 교회를 짓고 전도사를 파견하고 여러분의 학교를 지원한다면, 여러분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기독교가 더 이상 외국인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은 수긍하여 자신들의 교회를 짓기로 결정했다. 이것을 본 언더우드는 놀라서, “여러분은 이렇게 가난한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믿음이 깊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데 불가능한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_<언더우드> 8장 “한국에서의 운명의 날들”에서
그때 강변의 행주에서 시작되고 있던 작은 기독교 교회가 우리의 관심을 끌었다. 이것은 명백히, 콜레라에 전염된 사람들을 위하여 간호하고 치료했던 선교사들이 한 일의 결과였다. 뒤에서 언급하게 될 신(Shin)이라는 성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민족을 향한 선교사들의 수고와 사랑을 보고 그리스도의 복음이 놀라운 힘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사상은 그의 마음을 감동시켜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짐을 나르는 도구(‘지게’, jicky)를 메고 16킬로미터 떨어진 행주로 내려갔다. 그는 거기서 품팔이꾼으로 일하면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둘 믿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은 예배를 드리도록 자기 집을 내주었고, 아이들은 교회에서 찬송가를 배웠다. 언더우드는 문답을 거쳐 세례를 받겠다고 요청하는 사람이 100명이나 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_<언더우드> 9장 “순회 선교사”에서
언더우드는, 양반과 사대부 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오래전부터 생각해 오고 있었다. 그가 본 그들은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데 온갖 종류의 장애물들로 울타리를 두르고 있는 것 같았다. 예를 들면 황제가 종묘 앞에서 정기적으로 배례할 때마다 모든 공직자들은 함께 경배를 드려야만 했다. 더구나 대부분의 관리들은 대가족의 가장으로 가문의 위패를 책임지고 있었으며, 뿐만 아니라 중요한 산소들을 보살피고 제삿날이 돌아오면 엄격하게 제사를 모셔야 했다. 더불어 이들 대부분은 최소한 두 아내와 그에 따르는 가족과 자녀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들은 이 가족들에게 상당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는데, 실제로 대부분 본부인보다 후처에게 더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이유는 본처와는 대부분 매우 어렸을 때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부모가 짝지어 주는 대로 결합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들 생활의 모든 사회적·정치적·종교적 영향력들이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었다.
_<언더우드> 11장 “넓어지는 강”에서
원산에서의 이 놀라운 경험에 대한 이야기는 한국 전역에 퍼져, 1906년 봄과 초여름에는 그와 비슷한 놀라운 부흥이 남장로교 선교지부 한 곳을 휩쓸었으며, 1907년에는 북부 지방의 그리스도인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커다란 부흥이 뒤따랐다. 그 부흥들은 성격이 모두 똑같았고 한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에게도 영향을 미쳤는데, 그 특징은 아무리 작은 죄라도 감추어 놓고 있으면 사람을 못 견디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회개하는 사람들은 종종 바닥에 뒹굴거나 두려움과 슬픔에 사로잡혀 무섭게 경련을 일으켰다. 뒤이어 하나님의 거룩함에 거역한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의 고백이 있었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가 계속되었다. 또 전 회중은 통성으로 크게 기도했으며, 함께 울고 기뻐했다. 특히 1905년과 1906년 사이의 겨울에는 모든 선교회들이 성령의 은혜를 갈구하며 끊임없이 기도했기 때문에 각지에 축복이 다가오고 있다는 분위기가 감돌았다.
_<언더우드> 12장 “어둠과 빛”에서
<아펜젤러> 책 속으로
여느 선교사들보다 깨끗한 이미지를 남긴 44년간의 짧은 생애는 안타깝게도 불의의 사고로 마감됐지만, 아펜젤러가 이 땅에서 이루지 못하고 간 사역에 독자들이 조금이라도 부채의식을 느낀다면, 그의 짧고 깨끗한 삶이 한국교회에 새로운 선교 열기와 사명 수행의 힘찬 동력을 제공할 것이라 믿는다. ‘한국 근대의 선구자’ 아펜젤러의 삶을 조명하기 위한 개정판으로 이 책을 출간하는 것은 그가 온 지 130주년이 되는 시점인데도 이 책을 능가할 만한 아펜젤러 연구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는 아펜젤러의 일기와 보고서와 설교 등을 당시 한국 선교의 전반적인 상황과 연관시켜 면밀히 검토하고 연구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 이 땅의 감리교회와 교회사학계는 이런 요청에 부응해 아펜젤러 연구를 더욱 촉진해 나가야 할 것이다.
_<아펜젤러> “개정판 역자 서문”에서
아펜젤러가 한국에 왔을 때부터 알고 지냈던 친구들과 그와 편지를 주고받은 사람들이 기록하려고 했던 것은 단지 경건한 찬사의 말이 아니다. 그들은 아펜젤러와 그의 동역자들이 현실을 거슬러 하나님 안에서 이룩한 업적들을 보여 주려 한 것이다. 사실 아펜젤러가 처음 한국을 찾아왔을 때, 한국은 야만적인 이교도의 나라였다. 그러나 그가 죽어 한국을 떠났을 때 고요한 아침의 나라는 그 이름에 걸맞게 희망과 가능성과 능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오늘날 모습과 같은 기독교화된 조선을 위해 살고 일했다. 따라서 이 책의 많은 부분은 그가 사랑하여 기꺼이 생명을 바친 이 나라와 민족을 다룬다.
_<아펜젤러> “서문” 에서
한마디로 하나님의 손으로 지음받은 있는 그대로의 한국, 자연이 풍성함을 가져다준 있는 그대로의 한국은 신명기 8장에 그려진 약속의 땅처럼 영광스러울 정도로 아름답다. 유교 사상으로 둔해져 버린 이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알았더라면! 토지의 비옥도는 평균치 이상이므로 이 나라 사람들이 다 먹고 남을 만한 식량을 생산해 낼 수 있다. 이 나라를 둘러싸고 있는 바다는 등잔 기름이나 비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무한한 식량 창고이기도 하다. 육지의 바위에는 광맥이 많아 여러 풍부한 광물의 전시장과도 같다. 값지고 유용한 금속도 매우 풍부하다. 목재의 보고인 북쪽의 삼림, 교통 발달의 가능성, 천연 자원과 그 잠재력의 다양성 등은 독실한 신자의 입장에서든 과학자의 입장에서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자연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게 한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자기 뜻을 자유롭게 행할 수 있는 차지인(借地人)으로서 그리고 주님께 커다란 능력을 부여받은 자로서 이 아름다운 땅 위에 놓인 사람들이, 땅으로 하여금 한층 풍요로운 소출을 내게 하고 바다와 보물창고인 산과 금빛 모래가 풍부한 강으로부터 생활을 편안하고 풍요롭게 하며 더욱 고양시킬 수 있는 물질들을 얻도록 좀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더라면 좋았으리라는 아쉬움이 생긴다.
_<아펜젤러> 1장 “하나님의 한국”에서
그는 제일감리교회(The First Methodist Church)의 기도 모임과 조모임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으며, 4월 16일에는 ‘필라델피아 연회’의 회의록을 검토하고 감명을 받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내가 선택한 교회가 하고 있는 선한 사업은 내게 기쁨을 준다.” 또 그다음 주일의 일기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개혁교회에서 감리교회로 옮기는 문제에 대한 이전의 모든 생각과 논쟁들이 오늘 모두 끝났다. 나는 감리교회의 완전한 신자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택한 일이다.…이 일은 한동안의 기도와 묵상 끝에 이루어진 것이다. 1876년 10월 1일 회개한 이래 나는 주로 감리교인들과 함께 지내면서 개혁교회에서보다 훨씬 편안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감리교회에 가입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하며, 오늘 내가 한 일은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구주를 따르는 웨슬리적 삶의 방식을 그가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감리교의 신자로 받아들여진 것은, 1879년 4월 20일 H. C. 스미스(Smith) 목사가 목회하던 랭커스터 제일감리교회에서였다.
_<아펜젤러> 5장 “그리스도의 군병 훈련”에서
신학생들이 미드홀 내의 커다란 방에 들러 워즈워스, 아펜젤러와 이야기를 나눌 때면 화제는 곧 한국으로 옮겨 갔다. 이미 최소한 한 사람-한국에 교구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끼고 있던 한 사람-은 그 주제에 완전히 몰두해 새로이 얻은 지식을 남들에게 알리는 것을 즐겼으며, 그들이 관심 가지기를 바라면서 질문을 유도하기도 했다. 물론 각자의 관심 정도에 따라 결과는 다양하게 나타났다.…워즈워스는 새로 문호가 열린 그 지역에 가기로 결심하고, 실제로 자청하여 그 요청이 받아들여지기까지 했지만, 개인적인 이유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섭리는 그가 고국에 머물도록 했던 것이다. 그러면 누가 그를 대신할 것인가? 그는 바로 일본 열도에서 한반도로 눈을 돌리게 된 아펜젤러였다.
_<아펜젤러> 6장 “한국에 대한 관심”에서
다음 날 비가 오고 많은 사람들이 뱃멀미를 하는 가운데 기선은 출발하여 반도의 남단을 돌아갔다. 섬들이 점점이 박혀 있는 안개 낀 만(灣)을 통과하여 드디어 4월 5일, 그들은 수도 서울에서 약 50킬로미터 떨어진 항구 제물포에 도착했다. 1620년 미국으로 처음 이민 온 사람 중 메리 칠턴이 플리머스 바위에 첫발을 디딘 것처럼, 한국의 바위에 첫발을 디딘 사람은 아펜젤러 부인이었다. 부활주일이었던 그날, 아펜젤러는 이렇게 기도했다. “오늘 무덤의 빗장을 산산이 부수고 부활한 주께서 그들에게 빛과 자유를 허락해 주옵소서!”
_<아펜젤러> 8장 “항해와 첫인상”에서
스크랜턴 박사는 목격자의 시각에서 그의 동료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자기에게 닥치는 일을 거절하지도 않고 자기 몸을 아끼지도 않는다는 것은 그에게는 하나의 원칙이었다.…설교 다음으로는 교육이 그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문제였다. 그는 배재학당에서 대학의 모습까지 내다보고 있었으며, 그의 가르침을 받으러 오는 모든 학생들에게서 장래의 국가 고문, 한국을 혁신할 인재, 의의 왕국을 건설할 힘들을 볼 수 있었다. 그는 그들을 강제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때때로 탈선과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 안에는 그들을 진리로 이끌고 건강한 발전을 꾀하게 해주는 정신이 역사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_<아펜젤러> 14장 “재미있고 유쾌한 가정생활”에서
아펜젤러가 주축이 되어 미국인 개척자들이 구체화시켰던 교육은 이와 정반대의 것이었다. 그것은 처음에는 모든 면에서 한국인의 기질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곧 한국인의 절실한 필요를 채워 주고 한국의 정신적·사회적·정치적 질병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 교육은 학생들에게 생각하는 것을 가르쳤다. 그것은 훈련의 강조점을 암기에서 판단으로 변화시켰고, 시력을 통찰력으로 변형시켰다. 그것은 학생들에게 원인을 물어보라고 가르쳤으며, 인과관계라는 영원한 법칙을 체득하도록 가르쳤다.…이 민족 앞에 아펜젤러는 목소리와 펜으로 잔치를 베풀고, 생명의 떡을 쪼개 주어야 했던 것이다. 케케묵은 중국의 지식에 짓눌려 있던 젊은이들 대신에, 근대적 삶을 위해 준비된 수백 명의 교사들이 배재학당(培材學堂, The Hall for the Rearing of Useful Men)에서 배출되었다. 이곳에서, 깨어 있는 젊은이들과 탐구적인 성인들이 세계와 인류에 대해 알게 되고 자극을 받아, 예수가 구원하기 위해 자기 생명을 내어 준 자기 민족과 인류의 진보를 위해 훌륭한 역할을 수행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_<아펜젤러> 16장 “문자의 독점”에서
아펜젤러에게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고린도전후서가 맡겨졌다. 아펜젤러는 복음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보았다. 그는 마태가 전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복음과, 마가의 ‘가장 먼저 쓰인 복음’ 그리고 주님의 놀라운 행적들을 한글로 번역하는 것이 즐거웠다. 그리고 이방인의 사도가 쓴 ‘그 시대를 위한 소책자’ 한 쌍을 번역하는 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 작업 때문에 그는 머리가 셀 정도였다. 이 번역 개척자는 다이너마이트를 폭파해 구멍을 파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했으며, 나름의 도구를 만들어 정확한 용어와 원어에 해당하는 한글 단어를 찾거나 발명해야 했다. 결국 이 작업은 영광스럽게 끝났다. 1900년 9월 9일 한글 신약성경의 완성을 감사하는 예배가 서울의 제일교회에서 열렸다.
_<아펜젤러> 17장 “한국어를 익히다”에서
한국에서의 첫 공중예배는 서울의 남부에 있는 벧엘교회에서 1887년 4월 8일 부활절에 드려졌다. 거기서 아펜젤러는 그의 전도를 받은 첫 회심자인 한 여인에게 세례를 주고 성찬식을 가졌다. 그는 이미 일본의 그리스도인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직접적인 복음 전파 사역을 시작한 바 있었다. 크리스마스 무렵에는 세 나라 국적의 신자들로 이루어진 교회가 세워졌는데, 1904년 스크랜턴 박사는 이 장면을 이렇게 회상했다. “아펜젤러 형제는 서울의 중심부에 있는 한국인의 집을 하나 샀다.…처음으로 한국인들과 함께 공적인 예배를 드릴 장소를 마련한 것이다.….”
_<아펜젤러> 19장 “학교와 교회”에서
보울비는 두 명의 한국인(아펜젤러의 비서와 어린 소녀로 추측되는)이 그들의 선실을 나오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두 사람은 갑판까지 가지 못했으리라 생각된다. 갑판 앞쪽 절반은 이미 침수되었고 고물은 물 바깥으로 높이 솟아 있었다. 아펜젤러는 매우 흥분한 채 뛰어다니고 있었지만 배에서 피신하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보울비는 고물 쪽으로 달음질쳐 가서 난간에 올라갔다. 배가 가라앉았을 때 사방을 둘러본 그는 아펜젤러가 허리까지 물이 찬 채로 무언가 잡아 보려고 헛손질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_<아펜젤러> 25장 “타인의 생명을 구하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