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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영미소설
· ISBN : 9788932918228
· 쪽수 : 368쪽
· 출판일 : 2017-03-30
책 소개
목차
벙커 다이어리 5
옮긴이의 말 359
리뷰
책속에서
걸려들었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가 내 머리를 붙잡더니 축축한 천을 내 얼굴에 대고 세게 눌렀다. 숨이 막혀 오기 시작했다. 나는 화학 약품을 들이마시고 있었다 ─ 클로로포름, 에테르, 뭐 그런 것. 숨을 쉴 수 없었다. 공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허파에 불이 난 것 같았다. 이제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필사적으로 두 팔과 두 다리를 버둥거리고, 발을 차고 구르고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흔들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그는 힘이 셌다. 보기보다 훨씬 셌다. 그의 손이 바이스처럼 내 머리를 꽉 조이고 있었다. 몇 초 후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고, 그다음엔……
방 안은 그 어떤 곳보다 더 깜깜했다. 빛이 없었다. 보이는 것이 없었다. 나는 더듬더듬 문을 찾아 복도로 나왔지만 그렇다고 나아진 것도 없었다. 칠흑처럼 어두웠다. 내가 눈을 뜨고 있는지 감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몇 시인지 알 수 없었다. 시계를 볼 수 없었으니까. 몇 시쯤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짐작할 거리가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창문도 없고, 보이는 것도 없고, 하늘도 없고, 소리도 없었다. 그저 단단한 어둠과 벽 속에서 불안하게 웅웅 울리는 낮은 소음뿐이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다. 아무것도 아닌 것 속에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심장이 뜨거워지면서 안에서 울컥 감정이 치밀었다. 분노, 동정심, 두려움, 공포, 증오, 혼란, 절망, 슬픔, 광기. 나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고 소리를 지르면서 벽을 갈가리 뜯어 버리고 싶었다. 무언가를, 누군가를 패주고 싶었다. 그를 패주고 싶었다.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지? 어떻게 사람이 이런 짓을 할 수 있을까? 젠장, 얜 그냥 꼬마에 불과한데. 그냥 조그만 여자아이에 지나지 않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