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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기독교(개신교) > 기독교 역사
· ISBN : 9788933707173
· 쪽수 : 568쪽
· 출판일 : 2016-08-18
책 소개
목차
한국어판 서문/옮긴이 서문/옮긴이 해제
추천사
1장 서론
아시리아 동방교회 약사
종교적 영성
‘네스토리안’이라는 용어
2장 동방교회의 기원
유프라테스 강 양안 지역의 정치·종교 상황
안디옥의 바울과 초대교회
유프라테스 강을 건넌 기독교
인도 남부의 도마 기독교인들
3장 다양성에서 단일성으로: 교부들과 이단자들
삼위일체 개념과 그리스도 본성 문제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기독교
동방교회의 신학적 기초
네스토리우스와 에베소 공의회
4장 보편성을 상실한 기독교
칼케돈 공의회
비잔티움제국 내부의 신앙논쟁과 동방교회에 끼친 영향
시리아교회들을 하나로 묶은 『페시타』 성경
5장 셀레우키아·크테시폰 총대주교구
사산조페르시아 초기의 정치·종교 상황
사산조페르시아 때의 조로아스터교
한 세기 넘게(340~457) 지속된 순교와 처음 만들어진 교회계급제도
동방교회 조직
독립을 선언한 동방교회
복합단성론자와의 논쟁
450~650년 동방교회에 닥친 위기와 쇄신
시리아정교회의 대두
6장 동방교회의 신학과 영성
조로아스터교ㆍ마니교와의 싸움
성선설과 원죄
두 번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 생명나무와 부활의 십자가
동방교회의 성례전
교회건축과 예배―공간과 시간 속의 상징들
수도원제도와 금욕주의
동방교회 신비주의의 귀감, 달리아타의 요한
7장 무슬림 치하의 기독교인들
페르시아 만과 아라비아의 기독교인들
관용과 억압 사이에 끼게 된 기독교인들
동방교회의 전성기: 총대주교 디모데 1세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고대 유산의 보존
동방교회와 이슬람
동방교회는 우상을 반대하는가?
8장 동방선교
중앙아시아 비단길을 따라간 동방교회
알로펜 주교가 경교를 중국에 전하다
불교·도교와의 대화
9장 몽골인들의 시대
샤머니즘과 종교혼합주의
기독교 부족들
몽골에 찾아온 가톨릭교회 수사들
몽골의 동방교회 교인 왕비들과 고위 관리들
십자가와 연꽃: 중국 동해안에서 발견된 기독교와 불교 상징물의 합성
몽골 일칸들 치하에서 맞은 이란 지역에서의 마지막 융성기
몽골 일한국과 유럽의 동맹 기회
라반 사우마와 라반 마르코스―아시아에서 온 동방교회의 ‘마르코 폴로들’
티무르가 저지른 파괴와 산악지대로의 피난
10장 인도 남부의 도마 기독교인들
말라바르 해안의 동방교회 공동체
가톨릭교회로 강제 개종당한 동방교회 교인들
도마 기독교인들의 봉기
인도 동방교회의 재건
11장 시련과 분열의 시대
칼데아교회의 성립
총대주교들과 대립 총대주교들
20세기까지 오스만제국의 정치 상황과 칼데아 가톨릭교회
가톨릭교회·러시아정교회·개혁교회의 선교사들
1915~1918년의 집단학살
짓밟힌 희망
동방교회의 붕괴 원인
12장 아시리아 동방교회의 르네상스
망명지에 다시 세운 교회
21세기의 아시리아인들: 전망
동방교회의 정체성
세계 기독교의 통일을 위한 대화
동방교회와 그 신학의 타당성
주/참고문헌/부록/자료 출처/찾아보기
책속에서
서방이 동방교회와의 접촉을 배척한 결과 동방교회 스스로 동쪽으로 진로를 잡게 됐다. 바스라의 다윗David of Basra 주교가 295/300년 무렵 인도 케랄라Kerala에 있는 도마 기독교인들과 접촉한 것을 시작으로 동방교회 수도원 출신 선교사들이 아라비아 반도는 물론이고 중앙아시아 초원에 사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나섰다. 동방교회는 아랍 지역에 있는 교구들을 이슬람에게 빼앗기고, 또 중국에서의 첫 선교에서 쓴 맛을 본 후에 11세기부터 동방을 향한 선교를 새롭게 시작해 몽골족과 중국에까지 이르게 된다.
당시 동방교회 총대주교는 유프라테스 강에서 황해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관장하고 있었다. 게다가 7세기에 아랍인들이 지중해 남부와 동부까지 손아귀에 넣자 동방교회는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비잔티움제국이 다스리던 지역까지 서쪽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14세기 초에 총대주교는 직할구 셀레우키아·크테시폰 대교구를 포함해 모두 27개 대교구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각 대교구는 6개 내지 12개의 교구들로 나누어져 있었다.
― ‘1장 서론’ 중에서
신학적인 면에서 네스토리우스는 타협할 생각이 거의 없었다. ‘마리아는 한 인간, 신의 매개자를 낳은 것이지 하나님을 낳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네스토리우스는, 테오토코스라는 용어가 하나님이 출생·고통·죽음 같은 자연조건의 대상이라고 주장하는 데오파시스트파의 그리스도론을 뜻하기 때문에 이를 수용할 수 없었다. 몹스에스티아의 테오도로스에서 시작된 ‘테오토코스’ 호칭을 신학적으로 거부한다는 점에서 동방교회의 생각은 그 뒤로도 변함이 없었다. 동방교회의 마지막 위대한 신학자인 니시비스의 대주교 마르 오디쇼Mar Odisho(1250년 무렵~1318)는 이 개념을 신랄하게 논박했다. 첫째,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하고, 이 말을 삼위일체에 적용한다면, 마리아는 삼위일체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이다. 둘째, 마리아가 하나님을 낳은 자이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손자가 된다고 했다.
― ‘3장 다양성에서 단일성으로: 교부들과 이단자들’ 중에서
8, 9세기는 동방교회의 황금기였고 또 새로운 아랍·이란 문화의 개화기였다. 당시의 바그다드는 이란·그리스·시리아·인도의 철학적·지적 유산이 새로운 문화적 합성체를 만들기 위해 국제적인 이슬람의 안내를 받아 모두가 모여든 용광로였다. 유럽이 야만주의 속으로 가라앉는 위험에 처했을 때 이 새로운 이슬람 문화가 고대의 보물들을 모아 보존했고 12세기가 되어서 그것을 지금의 에스파냐 톨레도에 있는 대학에 전수했다. 유럽의 르네상스 정신에 비견되는, 패기에 찬 이슬람 정신이라는 지적인 호기심이 없었다면 서방은 결코―혹은 적어도 그 후 비잔티움제국의 몰락과 함께 그리스 학자들이 이탈리아로 간 후가 아니면―자기네들의 잃어버린 뿌리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아라비아의 학자들과 과학자들은 옛 문자를 해독할 수 없었고, 그리스어도 몰랐기 때문에 동방교회와 시리아정교회 교인들에게 중간자적 역할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 학문을 무시했던 라틴인들과는 달리 6세기가 시작될 무렵 시리아인들은 열정을 가지고 그리스 학문에 매달렸고 그리스 원전들을 시리아어로 번역했다.
― ‘7장 무슬림 치하의 기독교인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