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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북한사
· ISBN : 9788933707555
· 쪽수 : 404쪽
· 출판일 : 2019-02-25
책 소개
목차
머리말
프롤로그
문제 제기
앞선 연구들
연구 방법과 범위
제1장 독립운동의 거두
제1절 서울에서 옌안까지
1. 14살에 3.1운동 참여
2. 서울에서 청년운동
3. 중국 망명
4. 상하이에서 독립운동
5. 중공군 포병 장교가 되다
6. 2만 5천 리 대장정의 사투
7. 팔로군 포병단장
제2절 중국공산당 수뇌부와 무정
1. 중공 최고지도부와 친교
2. 중국공산당 수뇌부의 중매
3. 신민주주의와 통일전선
제3절 화북조선청년연합회 창립
1. 화북조선청년연합회 창립
2.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출범
3. 조선인 혁명 세력의 실체 과시
제4절 조선의용군 사령관
1. 화북조선독립동맹 창설
2. 무력투쟁의 첨병 조선의용군
3. 청년독립군의 산실 조선혁명군정학교
제2장 연안파의 분열
제1절 개인 자격 입국
1. 선양 탈출과 지도력 타격
2. 조선의용군 무장 입국 실패
3. 개별적으로 기차로 입국
4. 입국일은 1945년 12월 13일
5. 동북조선의용군의 확대와 입북
6. 동북조선의용군과 무정
제2절 귀국 후 연안파의 분열
1. 무정은 조선공산당으로
2. 김두봉은 조선신민당 창당
3. 옌안 시절부터 갈등
4. 해방 정국 연안파 분열의 의미
제3장 김일성과 무정
제1절 김일성과의 경쟁
1. 황해도의 ‘위대한 아버지’
2. 1946년 초까지 큰 인기
3. 남한정치에서도 큰 비중
4. 김일성의 견제
5. 김일성의 연안파 분열 전략
제2절 당에서 군으로
1. 1946년 당내 권력 상실
2. 북한군 창설에 핵심 역할
3. 초대 보안간부훈련소 사령관?
4. 초대 인민회의 대의원
5. 최용건과의 주도권 다툼
제4장 숙청
제1절 숙청의 예비 단계
1. 공식 비판의 시작
2. 초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탈락
3. 6.25전쟁 계획에서 배제
4. 공격의 핵심에서도 배제
제2절 전쟁, 숙청으로 가는 길
1. 북한군 초기 작전 실패
2. 인민군 제2군단장
3. 결이 다른 만주파와 연안파
제3절 전격적 숙청
1. 숙청의 첫째 이유는 명령 불복종
2. 숙청의 둘째 이유는 군벌주의적 만행
3. 인민군 39호병원에서 위암 수술 중 사망
4. 조직적 저항력 결여
5. 1994년 복권
제5장 숙청의 원인과 영향
제1절 숙청의 실제 원인
1. 김일성 못지않은 명성
2. 연안파에 대한 경계
3. 김일성의 패전 책임 전가
4. 정치력 부재
5. 소련과의 유대 결여
제2절 중국의 방관
1. 결코 나서지 않은 중국
2. 숙청 당시 중국은 전쟁에 몰두
3. 북.중 가교 역할은 박일우가 담당
4. 중.소 관계 관리에 집중
5. 중국인 아내를 버린 무정
제3절 무정 숙청과 김일성 유일체제
1. 무정 이후 연안파 연쇄 숙청
2. 허가이.박헌영도 제거
3. 김일성 유일체제 확립 전략의 시발점
제6장 무정의 정치 노선
1. 철저한 민족주의
2. 민족통일전선론
3. 국제연대주의
4. 절대적 평등주의
5. 평화통일론
에필로그
무정 연보
참고문헌
찾아보기
저자소개
책속에서
무정武亭의 본명은 김병희金炳禧이다. 한동안 본명이 김무정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중국 지린성吉林省 룽징龍井에 사는 무정의 8촌 조카 김하수金河壽가 무정의 본명을 김병희로 얘기하면서 비로소 본명이 알려졌다.
1924년 중국에서 군관학교에 다닐 때 실제 전투에 참가해서 적을 격퇴시켰는데, 이를 기특하게 여긴 그의 상관이 군인을 뜻하는 ‘무武’ 자를 넣어 지어 준 이름이 무정이다. 그래서 특이한 이름 ‘무정’을 갖게 되었다. 한자로는 武丁, 武靜 등으로 쓰다가 나중에는 武亭으로 썼다. 무정이 스스로 쓴 팔로군 간부이력표가 중국 중앙당안관(정부기록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는데, 거기에 자신의 이름을 武亭으로 써 놓았다.
- 제1장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시절 무정은 ‘사꾸라 몽둥이櫻棒子’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별명을 얻게 된 데는 사연이 있었다. 당시 상하이에는 조선인학교인 인성학교가 있었다. 매년 운동회가 열렸는데, 이때에는 상하이에 사는 대부분의 한인들이 모여 명절을 쇠듯 했다. 한인들 사이에는 우파도 있고, 좌파도 있었다. 그래서 이런 큰 모임이 열릴 때면 서로 논쟁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한번은 어떤 이가 무정을 보고 공산주의자라고 비방했다. 무정은 그 자리에서 사꾸라 몽둥이로 그 사람을 쳤다. 그 바람에 모두들 혼비백산하게 되었다. 이 일이 있은 후 무정의 별명이 사꾸라 몽둥이가 되었다.
- 제1장
무정은 입북 직후 북한정치의 중심부로 뛰어든다. 그의 정치적 무게, 그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가 자연스럽게 그렇게 만들었다. 해방 직후 북한 지역에서 국가 건설 과정에 참여하면서 정치적 헤게모니 경쟁을 벌이던 정치 세력은 모두 다섯으로 분류할 수 있다.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만주파, 중국 옌안에서 중국공산당과 함께 항일운동을 벌이던 연안파, 소련공산당에서 활동하다 해방 직후 소련군을 따라 입국한 소련파, 국내에서 좌파 지하운동과 독립운동을 전개해 온 국내파, 그리고 우파 입장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민족주의 세력 등이 그들이다. 만주파는 전투적 투사형이면서 순박한 면도 있었고, 연안파는 온화한 선비형이었으며, 소련파는 관료적이었다. 국내파는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기반으로 한 만큼 철저한 혁명주의자들이 많았고, 민족주의 세력은 사회혁명보다는 완전한 독립을 최우선으로 하는 우파였다.
- 제2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