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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근현대사 > 한국전쟁 이후~현재
· ISBN : 9788934977728
· 쪽수 : 300쪽
책 소개
목차
서문-학문으로 국가의 자존심을 지킨 국제법 학자
제1부 국제법의 존재 이유
1. 외교력이 향상되어야 국민의 삶도 좋아질 수 있다
2. 국제법으로 일본의 책임을 추궁하다
3. 돌고래 프로젝트
4. 납치당한 중공 여객기의 한국 착륙과 국제법
5. 국제법 연구의 요람 서울국제법연구원을 설립하다
제2부 국제법 학자로서의 양심과 책무
6. 재일 동포와 종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발언하다
7. 국제법 논리로 프랑스가 약탈해간 의궤의 반환을 요구하다
8. 장남을 데려오기 위해 차남을 보낼 수는 없다
9.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책임은 소멸되지 않았다
10. 을사조약과 정미7조약은 국왕의 비준이 없어 국제법상 무효다
11. 일본의 집요한 독도 영유권 주장을 비판하다
12. 아, <관판실측일본지도>
제3부 국제사회를 향하여
13. ‘한국적 국제법’을 위한 학술지
14. 한국 최초로 유엔 고위직에 임명되다
15. 포화 속의 아프가니스탄에 가다
16. 한국 컴퓨터를 유엔 전산화 계획에 지원하다
17. 아프가니스탄의 집단 학살을 세계에 알리다
제4부 민족과 국가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하여
18. 드디어 나타난 <관판실측일본지도>
19. 외규장각 의궤의 반환만이 올바른 해결책이다
20. 맞교환 합의에 분노하다
21. 일제의 한국 병합 불법성을 세계에 알리다
22. 외규장각 의궤 맞교환 백지화되다
23. 미완의 저서 《독도와 국제법》
에필로그
백충현 연보
주석
인터뷰 및 참고문헌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백 교수는 동아시아연구소에서 연구원 생활을 하면서 우리나라 국제법이 개발도상국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절실하게 느꼈다. 법대에 입학한 대부분의 학생들도 국내 사법 고시를 통해 판검사로 입신양명하는 데에만 관심을 가졌다. 서교동으로 이사하면서 번듯한 서재를 갖게 된 백 교수가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냈다. ‘국제법에 관심 있는 사람들과 연구 모임을 가지면 좋겠군.’ 백 교수는 즉각 후배들의 의견을 물었다. 외무부에 근무하는 권병현, 김석우, 신각수, 정태익 서기관 등이었다. 백 교수의 제안에 갓 외무부에 들어가 패기와 열정이 가득했던 신참 외교관들은 이구동성으로 좋은 의견이라며 찬성했다. 연구회 모임이 있는 날 저녁이면 백 교수의 집은 외교관과 대학원 학생들로 북적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모인 인원이 한방에 다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많아 마루 건너에 있는 다른 방을 사용하면서 양쪽 방문을 열어놓고 통방을 해야 했다.
-제1장 ‘외교력이 향상되어야 국민의 삶도 좋아질 수 있다’ 중에서
<관판실측일본지도>에는 경상도 남쪽은 그려져 있지만 그 오른쪽에 울릉도와 독도는 없었다. 일본 서북쪽의 오키섬은 그려져 있었다. 오키 섬과 독도의 거리는 157킬로미터였다. 백 교수는 <관판실측일본지도>에 도쿄에서 남쪽으로 약 1,0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오가사와라제도가 그려져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혹시 멀리 떨어져 있는 섬은 표기가 안 되어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오가사와라 제도는 별도의 칸을 만들어 매우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백 교수는 일본 본토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오가사와라 제도는 표기하면서, 그 4분의 1 거리에 있는 독도를 표기하지 않았다는 건 일본 영토로 파악하지 않았다는 의미라고 판단했다. 그는 일본과의 영유권 다툼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관찬 지도를 발견했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백 교수는 <관판실측일본지도>를 반드시 입수하겠다고 다짐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제12장 ‘아, <관판실측일본지도>’ 중에서
며칠 후 백 교수는 유엔인권위 관계자와 전문가 두 명과 함께 탈레반의 안내를 받아 아프가니스탄 북부 지역에 위치한 마자르 이 샤리프의 동쪽에 위치한 쉬베르간에 도착했다. 작년 5월 탈레반과 연합해 북부 지역을 관리하고 있는 도스툼 장군이 안내를 맡았다. 지난 5월, 탈레반들이 북쪽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총공세를 폈다. 이때 마자르 이 샤리프까지 진격해 북부 동맹군을 무장 해제시키려다 오히려 탈레반 민병대 3,000여 명이 포위되어 포로가 되었다. 포로들은 자신들이 교환된다는 말을 듣고 끌려나간 뒤 15미터 깊이의 구덩이에 강제로 들어가야 했다. 이를 거부하면 즉각 사살되었다. 포로들이 구덩이에 80~100명 정도 채워지면 수류탄을 던지고 흙으로 구덩이를 메웠다. 도스툼 장군은 백 교수 일행을 데리고 구덩이로 추정되는 곳으로 데려갔다. 탈레반 민병대가 구덩이를 파자 포로들의 시신이 드러났다. 너무 끔찍해 모두들 고개를 돌렸다. 도스툼 장군의 증언대로 100여 구의 시체가 있었다.
-제17장 ‘아프가니스탄의 집단 학살을 세계에 알리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