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상드르 뒤마 피스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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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4년 7월 27일, 프랑스 문학사에 찬란히 이름을 남긴 대문호 알렉상드르 뒤마 페르(Alexandre Dumas pere)와 재봉사였던 평범한 여인 마리카트린 르베(Marie-Catherine Lebay) 사이에서 태어났다. ‘페르(pere)’는 프랑스어로 ‘아버지’를, ‘피스(fils)’는 ‘아들’을 뜻한다. 같은 이름을 지닌 부자(父子)는 그 구분을 위해 각기 ‘뒤마 페르’와 ‘뒤마 피스’로 불린다. 혼외 자식으로 태어난 그는 태생부터 세상의 질서에 틈입한 존재였다. 출생 신고조차 어머니 이름으로만 이루어졌고, 유년 시절은 어머니 곁에서 보내다가 일곱 살이 되어서야 아버지에게 친자로 인정받는다. 그때부터 그는 어머니와의 이별을 감수하고 아버지의 보호 아래 살아가게 된다. 뒤마 페르는 아버지로서, 그리고 문인으로서 아들에게 풍요로운 교육 환경을 제공했다. 그러나 혈통의 인정이 곧 평탄한 삶을 보장해 주지는 않았다. 아들 뒤마는 기숙 학교에서 귀족 자제들 사이에 섞여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되었고, ‘사생아’라는 낙인은 그를 오랜 시간 괴롭혔다. 이러한 경험은 그의 정신과 문학의 지층을 깊이 파고들었고, 훗날 그의 작품 속 인물들에 고스란히 투영된다.
뒤마 피스는 처음에는 시에 매료되어, 21세에 《젊은 날의 죄악(Peche de la jeunesse)》을 출간한다. 그러나 큰 반향을 얻지 못했고 이후 발표한 몇 편의 산문과 소설 역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전환점은 23세에 발표한 소설 《동백꽃 여인(La Dame aux Camelias)》이었다. 이 작품은 단숨에 대중과 평단의 호평을 얻으며 그의 이름을 문단에 우뚝 세웠다. 그는 생전에 20여 편의 희곡과 15편의 소설, 다수의 에세이와 논픽션을 남겼고, 아버지와는 달리 도덕성과 현실 문제에 천착했다.
뒤마 피스는 작품을 통해 인간의 도덕적 책임, 여성의 사회적 지위, 결혼 제도, 물질주의, 가족 내 갈등 등을 꾸준히 탐색했다. 특히 당시 프랑스 사회의 이중적 도덕성과 여성에 대한 편견을 강하게 비판했다. 《동백꽃 여인》을 비롯해 《드미 몽드(Le Demi-monde)》, 《돈 문제(La Question de l’argent)》 등에서 그는 매춘 여성들의 삶을 연민과 사실성으로 그려 냈다. 귀족 남성들이 화류계 여성과 관계를 맺으면서도 결혼 상대는 ‘순수한 귀족 여성’이기를 원하는 위선을 그는 신랄하게 비판했다. 《사생아》는 작가 자신의 삶을 거의 그대로 투영한 작품으로, 사생아로 태어난 주인공이 사회 냉대 속에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문학 비평가 칼슨은 “그처럼 대담하게 당대 사회를 무대 위에 올린 이는 없었고, 그토록 세밀하게 삶의 단면을 포착한 이도 없었다”고 뒤마 피스를 평한 바 있다. 말년에는 문학 비평가, 에세이스트로서 역할에 충실했다. 1874년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에 선출되었고 1894년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는다. 하지만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었으며 화려했던 사회 활동은 점차 줄어들었다. 1895년 11월 27일 파리 근교의 자택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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