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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36439033
· 쪽수 : 296쪽
· 출판일 : 2023-05-15
책 소개
목차
묘비 세우기
피존
사계
이지의 다카코
심해로부터
캐리어
하비의 책
복된 새해
해설 | 소유정
작가의 말
수록작품 발표지면
저자소개
책속에서
그즈음부터 연주에게는 기묘한 습관이 하나 생겼다. 연주는 주로 컵 아이스크림을 먹었는데, 반만 먹고 남은 반에는 새 플라스틱 숟가락을 꽂아두곤 했다. 재언의 몫이었다. 한정 아이스크림은 그때가 아니면 팔지 않으니까 재언을 위해 남겨두겠다는 핑계였다. 재언은 그녀의 습관에 묘비 세우기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더는 차가운 음식을 먹지 않겠다는 재언의 다짐은 변치 않았고, 냉동고는 일종의 공동묘지가 되어갔다. (「묘비 세우기」)
아직 버려야 할 게 많았다. 냉동고를 열자 줄줄이 서 있는 아이스크림 통들이 보였다. 연주는 그 컵들을 모조리 쓰레기봉투에 쓸어 담았다. 그리고 봉투를 싱크대까지 끌고 왔다. 아이스크림 통을 하나씩 열자 짓쑤시고 파낸 흔적과 그 가운데 당당하게 꽂힌 플라스틱 숟가락이 보였다. 얼마나 단단하게 얼어붙었는지 숟가락은 좀처럼 뽑히지 않았다. 연주는 어금니를 악물고 있는 힘껏 숟가락을 잡아당겼다. 재언의 일부는 이제 자신이 가본 적도 없는 산에 흩뿌려질 것이다. 묘소라고 할 만한 것도 없으니 묘비를 세울 일도 없었다. 그런데 인간도 아닌 아이스크림 주제에 묘비라니. 재언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별명을 붙였는지 궁금했다. 묘비는커녕 조금만 힘주어 당기면 부러지고 말 플라스틱 숟가락에 불과했다. (「묘비 세우기」)
가로수 한그루 없는 도로로 햇빛이 무너지듯 쏟아졌다. 바람은커녕 차들이 지나갈 때마다 탄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있는 그늘이라곤 서로의 그림자가 다였다. 명조는 괜찮다고 말했다. 무엇이, 어떻게 괜찮아질지는 모르나 그 말 밖에 나오지 않았다. 미주와 명조는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미래에 대한 확신을, 남아 있는 부스러기를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보이는 건 핏발 선 흰자와 탁한 눈동자뿐. 받아들여야 했다. 이제는 꿈꾸는 일이 두려웠다. (「사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