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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전 한국소설
· ISBN : 9788936462383
· 쪽수 : 297쪽
· 출판일 : 2005-11-25
책 소개
목차
간행사
조세희
뫼비우스의 띠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윤흥길
장마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이메일 해설 - 박경이, 이수형
낱말풀이
리뷰
책속에서
날이 밝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누워 난 한겨울 동안 어머니는 취로장에 나가 일했다. 어머니가 집을 나설 때마다 맞았던 그 새벽의 빛깔을 이제 알았다. 자갈 채취선에서 날카로운 금속성이 들려왔다. 내가 탄 택시는 남산 터널을 빠져 시내를 가로질러 달렸다. 죄인들은 아직 잠자고 있었다. 이 거리에서 구할 자비는 없었다. 나는 낙원구에서 내렸다. 나는 낙원구의 거리와 골목을 걸으며 시간을 보냈다. 마지막으로 다방에 들어가 차를 마셨다. 차를 마시면서 아버지의 도장이 찍힌 매매증서를 꺼내 찢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이 일대는 채마밭이었다. 나는 차를 마시고 채마밭 위에 깔아놓은 포장도로를 따라 걸었다. 이제 더 이상 헤맬 필요가 없었다. 나는 곧장 행복동 동사무소를 향해 갔다. 동사무소는 아침부터 붐볐다. 내가 줄 뒤에 가서 서는 것을 건설계원이 힐끗 보았다. 그는 일을 하다 말고 나를 뚫어지게 보았다.
"난장이 딸 아냐?" -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중에서
그들을 태운 택시가 어쩔 수 없이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광주단지의 관문에 다다랐을 때 검문에 걸렸다. 원시 무기로 무장한 일단의 청년들이 살기등등해가지고 무조건 차에서 내릴 것을 명령했다.
"아하, 투쟁위원님이 타구 계셨군요. 단신으로 서울까지 쳐들어가서 투쟁하시긴 아무래도 무립니다. 어서 내리십쇼."
웬 청년이 다가오더니 허리를 굽실하고 빙싯빙싯 웃으며 친절히 말했다. 청년은 용케도 그를 알아보는 모양이나 이쪽에서는 상대방이 누군지 전혀 기억에 없었다. 잠시 그가 어물쩍거리자 곁에 있던 다른 청년이 잡담 제하고 몽둥이를 휘둘러 단박에 차창을 박살 내버렸다.
"개새끼들아, 늬들 목숨만 목숨이냐?"
"다른 사람들은 몇 끼씩 굶고 악을 쓰는 판인데 택시나 타고 앉았다니, 늘어진 개팔자로군."
"굶어도 같이 굶고 먹어도 같이 먹어! 죽어도 같이 죽고 살어도 같이 살잔 말야!"
각목이나 자전거 체인 따위를 코앞에 들이대면서 청년들이 가뜩이나 쉰 목청을 한껏 드높이고 있었다. 물론 그러기 전에 차에 탔던 승객들은 차창이 부서져 나가는 순간 밖으로 뛰어나와 이미 절반쯤은 죽어 있었다. - 윤흥길,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