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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사 일반
· ISBN : 9788936810047
· 쪽수 : 564쪽
· 출판일 : 2010-12-10
책 소개
목차
고조선부터 후삼국까지
1 한민족의 시조, 단군
2 최초의 영웅이자 신화가 된, 주몽
3 해상왕국을 이룬, 근초고왕
4 최강의 정복 군주, 광개토대왕
5 비운의 군주, 성왕
6 삼국 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진흥왕
7 고대 음악의 마에스트로, 우륵
8 고대 미술의 금자탑, 담징
9 최초의 여성 군주, 선덕여왕
10 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
11 고구려의 마지막 방어선, 연개소문
12 삼국 통일의 주역, 김춘
13 덕과 지혜, 용맹을 모두 갖춘 명장, 김유신
14 한국 불교의 횃불, 원효
15 한국 불교 사상의 토대를 닦은, 의상
16 고구려를 계승한, 대조영
17 세계의 명장, 고선지
18 풍수지리설을 제창하다, 도선
19 공부의 신, 최치원
20 시대를 앞서 간 선구자, 장보고
21 백제의 부활을 꿈꾼 영웅, 견훤
22 사라져 간 통일의 꿈, 궁예
고려 시대
23 민족 대통일의 위업을 이루다, 왕건
24 소통을 강조한 재상, 최승로
25 역사상 최고의 외교관, 서희
26 고려 불교의 원류, 의천
27 고려의 동북방을 개척한, 윤관
28 선진적 지식인, 김부식
29 칭제건원의 무산된 꿈, 묘청
30 무신의 시대를 연, 정중부
31 무신 시대의 전성기를 구가한, 최충헌
32 무신 시대 문인의 애환, 이규보
33 민족 문화의 보고 《삼국유사》, 일연
34 〈다정가〉를 지은 고려의 문장가, 이조년
35 박학다식한 고려의 지성인, 이제현
36 화약의 선구자, 최무선
37 의생활을 뒤바꾼, 문익점
38 좌절된 개혁, 공민왕
39 혼돈의 시대에 개혁을 꿈꾸다, 신돈
40 고려 최후의 보루, 최영
41 고려의 마지막 충신, 정몽주
조선부터 대한민국까지
42 변방의 무장에서 새 왕조의 주인으로, 이성계
43 500년 조선왕조의 기반을 다지다, 정도전
44 태종의 치적 뒤에 자리한 장자방, 하륜
45 조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 세종
46 청백리의 표상, 황희
47 신분의 굴레를 뛰어넘은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
48 왕위 찬탈자인가, 위대한 군주인가, 세조
49 모사가인가, 지략가인가, 한명회
50 단종을 향한 일편단심, 성삼문
51 국력을 신장시킨 외교와 국방의 달인, 신숙주
52 사림의 영수, 김종직
53 비운의 폐왕, 연산군
54 도학 정치를 꿈꾼 급진적 이상주의자, 조광조
55 조선 최초의 자연철학자, 서경덕
56 조선 주리철학의 선구자, 이언적
57 중세의 봉건적 질서에 반기를 들다, 임꺽정
58 동방의 주자, 이황
59 조선의 주자학을 일구다, 조식
60 동서 분당의 시대, 정인홍
61 어린 천재에서 희대의 정치가로, 이이
62 전란 속에서 나라를 구한 재상, 유성룡
63 한국 해전의 역사를 새로 쓰다, 이순신
64 조선 의학의 집대성 《동의보감》, 허준
65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다, 정여립
66 홍길동의 아버지, 허균
67 대동법을 실시한 실리적 개혁가, 김육
68 명분인가 실리인가, 최명길
69 우리말의 가락을 살려 우리 글자로 쓰다, 윤선도
70 유림 위에 군림한 정치 사상계의 거장, 송시열
71 성리학계의 이단아, 윤휴
72 붓으로 살려낸 만물의 조화, 정선
73 경세치용의 학문을 열다, 이익
74 당쟁 속에서 탕평을 실천한 재상, 채제공
75 못다 한 개혁의 꿈, 정조
76 정조의 남자, 홍국영
77 실학의 아버지, 박지원
78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정약용
79 한국화의 전통미를 일구어 낸, 김홍도
80 조선을 뒤흔든 농민봉기의 지도자, 홍경래
81 한국적 서체를 완성하다, 김정희
82 자주적 근대화를 주장한 개화 사상가, 박규수
83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
84 조선의 마지막 봉건주의자, 이하응
85 격동의 역사 속 비운의 황제, 고종
86 풍전등화의 조선에서 치열하게 살다 간 여걸, 명성황후
87 암살당한 개혁의 불꽃, 김옥균
88 한국 민중 저항사의 상징, 전봉준
89 민중 계몽으로 자주독립을 꾀하다, 서재필
90 청년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운, 안창호
91 총 한 자루로 제국주의를 처단하다, 안중근
92 〈님의 침묵〉, 한용운
93 나라는 망해도 민족은 망하지 않는다, 신채호
94 항일 무장 투쟁의 영웅, 김좌진
95 삼천 만 동포에게 고함, 김구
96 좌익과 우익, 한국 현대사의 갈림길에서, 여운형
97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
98 시대를 앞서 간 비운의 여인, 나혜석
99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받지 않는다, 박정희
100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전태일
책속에서
때마침 소손녕이 대신과의 면담을 요청해 왔다. 자연스럽게 서희가 조정 대표로 뽑혔다. 거란의 군영에 도착한 서희에게 소손녕이 뜰에서 절을 하라고 요구하자 서희는 “뜰에서의 배례란 신하가 임금에게 하는 것”이라며 단호히 거절하고 서로 대등한 예를 행한 뒤 마주 앉았다.
두 사람의 대화는 거침이 없었다. 소손녕이 먼저 침입의 이유를 밝혔다. “그대의 나라는 신라의 옛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의 옛 땅은 우리가 소유했는데 그대들이 그 땅을 침식하므로 평정하러 왔다.” 소손녕은 또 “고려는 우리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나 바다 건너 송나라를 섬기기에 공격한 것”이라고 호통을 쳤다.
그러자 서희가 이에 반박했다. “우리나라는 고구려의 옛 터전을 이어 나라 이름도 고려라 했고, 평양을 도읍으로 삼았다. 만약 땅의 경계를 가지고 논한다면, 거란의 동경(東京, 지금의 랴오양)도 우리 경내에 들어가니 어찌 침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뿐만 아니라 압록강 안팎도 역시 우리 경내인데 지금 여진이 그곳을 점령해 간사한 짓을 하므로 도로가 막혀 고려가 어려움을 겪는다. 거란과 소통하지 못하는 것은 다 여진 때문이니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되찾게 된다면 어찌 우리 조정에서 거란을 불러들이지 않겠는가.”
서희의 당당하고 설득력 있는 주장에 소손녕은 크게 감탄했다고 한다. 소손녕은 본국의 황제에게 서희의 주장을 보고했고, 거란 황제는 고려가 내세운 조건을 받아들여 화의를 승낙하며 철군을 명령했다. 거란은 송나라와 대치 중인 상황에서 고려와 장기전을 벌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_역사상 최고의 외교관, 서희 중에서
정여립이 진짜 반역을 도모했는지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문제이다. 《선조수정실록》에는 그의 반란에 대한 근거로 다음을 들고 있다. 첫째, 그는 평소에 제자들에게 “사마온공의 《통감》은 위魏로 기년을 삼았으니 이것이 직필直筆인데 주자가 그것을 그르게 여겼다. 대현의 소견이 각기 이렇게 다르니 나는 이해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즉 주자학을 비판하는 그의 논조는 성리학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반역의 근거로 본 것이다.
둘째, 그가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정해진 임금이 없겠는가. 요, 순, 우임금은 서로 전수하였으니 성인이 아닌가.”라고 말했다는 기록과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것은 왕촉이 한때 죽음에 임하여 한 말이지 성현의 통론은 아니다. 유하혜는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겠는가’ 하였고, 맹자는 제나라 선왕과 양나라 혜왕에게 왕도를 행하도록 권했는데, 유하혜와 맹자는 성인이 아닌가.”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내용들은 왕조의 정통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발언이다. 부자세습으로 이어지는 왕조가 옳지 않음을 역설할 뿐만 아니라 천하가 공물이라는 주장은 천자는 하늘이 내린 것이라는 의견을 깨고 민본주의를 지향하며, 나아가 맹자의 역성혁명을 간접적으로 지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내용은 정여립만이 생각하던 것은 아니었다. 기대승과 이이도 임금인 태감을 물러나게 한 이윤을 거론하면서 선조에게 군주로서의 자세와 왕도 정치를 강조했다.
하지만 정여립이 자살을 하면서 동인과 정여립은 모반죄로 몰렸고 동인 1천여 명이 숙청을 당했다. 이를 기축옥사라고 한다. 이 사건으로 동인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으며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서인의 지나친 세력 확대는 선조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정철이 후계자 문제를 거론하다가 밀려나면서 다시 동인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_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다, 정여립
전태일과 삼동회 회원들은 11월 13일, 근로기준법은 노동자들의 인권을 보호하지 못하는 무능한 법임을 고발하는 뜻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갖기로 결의했다. 결행일은 11월 13일이었다. 그는 이때 “이번만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결단코 물러서지 말고 싸우자.”라고 힘주어 말했다.
11월 13일, 평화시장 일대는 경찰들이 삼엄하게 진을 치고 있었고 업주들은 종업원에게 “오늘 행사에 절대 가담해서는 안 된다.”라고 주의를 내렸다. 삼동회 회원들은 평화시장 앞에서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업주와 경찰 들이 현수막을 빼앗는 등 시위를 진압하려 하자 전태일은 온몸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평화시장 앞을 달렸다. 뒤늦게 도착한 기자들이 취재를 시작했다. 약 3분가량 전태일의 몸이 불탔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뜻밖의 상황에 당황해 불을 끌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이 소식을 듣고 공장의 수많은 노동자들이 달려 나와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전태일은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이렇다 할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자신이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이루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스물두 살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전태일의 죽음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고 지금도 노동자들의 정신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_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전태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