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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37448676
· 쪽수 : 416쪽
· 출판일 : 2025-12-12
책 소개
■집집마다 담긴 열 가지 이야기
서울시 동작구 사당동의 시장과 골목을 지나면 소설가 김봄이 한 집 한 집 기워 낸 인정빌라가 나온다. 방울토마토 넝쿨이 건물을 뒤덮었으며 텃밭이 된 주차장에는 정확히 밥때 전까지만 대화를 이어 가는 세 명의 할머니가 앉아 있는 곳. 이 책은 인정빌라의 한 집 한 집을 세밀한 시선으로 들여다보며 집집마다의 이야기가 서로 얼마나 다르고 다채로운지 보여 준다. 햄스터를 키우기 시작하며 생명과 가족의 의미를 되짚어가는 4인 가족의 집, 언제라도 떠날 것처럼 캐리어를 정리하지 않는 애인 필과 사는 지연의 집, 홀로 강아지 메리와 살며 죽은 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자꾸만 잊고 전화를 거듭하는 진국의 집, 애인과 애인의 커다란 개와 함께 사는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 범준의 집, 사랑했던 이의 죽음이라는 슬픔을 안고 배낭 하나만큼의 짐만 갖고 사는 박하의 텅 빈 집, 딸의 등록금 마련을 위해 하루하루 분투하는 석희와 병철의 집, 그리고 빌라 맨 위층에 살며 때로는 다정하게 때로는 성가시게 빌라를 돌보는 주인 내외 지성과 막례의 집까지. 우리는 이토록 다른 이들에게서 일관된 고단함을 본다. 그리고 그들의 삶으로부터 우리의 얼굴을 발견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소설가 김봄은 인물의 표면과 이면을 동시에 조명한다. 우리는 인정빌라의 이웃들은 미처 모를 인물들의 뒷모습을 본다. 빌라의 주인 막례는 눈물 자국이 선명한 얼굴로 귀가한 박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밥상을 내어주는 인정 많은 노인임과 동시에 매일 낮 빌라 앞에 친구 둘과 모여 앉아 빌라 사람들에 대한 입방아를 찧는 오지랖 넓은 이이기도 하다. 302호의 진국은 백화점 붕괴 사고로 딸을 잃고 강아지와 함께 홀로 살아가는 쓸쓸하고 정중한 사람이지만 젊은 시절에는 임대업에 종사하며 교묘한 술수로 임차인의 전 재산을 갈취하는 일에 종사했던 이이기도 하다. 덕분에 우리는 인정빌라에서 펼쳐지는 삶이 그 인물의 전부가 아님을, 사람은 언제나 복잡하고 입체적이며 누구도 그 전체를 알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누군가에 대해 한마디로 단정 짓지 않도록 하는 것, 그리하여 그를 더 오래도록 바라보게 만드는 것은 문학이 다할 수 있는 최선의 역할일 테다.
■기척이 포옹이 되기까지
우리는 이웃의 얼굴을 모르는 시대를 살아간다. 이웃의 존재는 대체로 문 여닫는 소리나 복도에서의 작은 대화 소리 등 기척으로만 감지된다. 인정빌라 역시 다를 게 없는 곳이었다. 건물 전체에 정체 모를 지독한 냄새가 풍겨 주민들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조차도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문 닫는 소리를 들었다거나, 요즘 통 안 보인다거나 하는 증언이 전부다. 이때, 방울토마토 넝쿨의 이파리가 창문을 넘어 방 안을 엿보듯 서로를 향해 손을 뻗는 이들이 있다. 막례가 진국이 키우는 강아지의 안부를 챙길 때, 하루하루 삶에 치이는 병철의 어깨에 지성의 팔이 감길 때, 그렇게 기척이 포옹이 되는 순간 인물들은 서로를 다시 바라보게 된다. 우리는 이름 모를 이웃에게 무심하게 굴 때가 대부분이지만, 동시에 누군가의 다정을 무작정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정빌라』는 기척이 포옹으로 넘어가는 순간의 용기와 온기를 포착하는 작품이다. 그 순간을 손에 꼭 쥔 채 이 겨울을 맞이해 봐도 좋을 것이다.
목차
짝 7
끝말잇기 49
분홍 코끼리 93
개와 당신의 이야기 137
아는 사람의 장례식 181
새들도 멀미를 한다 225
대문 없는 집 265
우리에게는 적당한 말이 없어 307
핑퐁 351
작가의 말 387
작품 해설-정홍수 390
추천의 글-진달래 414
저자소개
책속에서
며칠 비가 왔고, 또 며칠은 바싹 마른 날이 이어졌다. 장마철 무거운 공기 속에서 톡 쏘는 냄새는 배양이 된 듯 더욱 강렬해졌고 건조한 날이 이어지자 사방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건물 골조 사이에 묻혀 있는 하수 배관을 타고 부패한 단백질 냄새가 온 세대를 돌고 돌았다. 물은 흘러 내려갔지만 냄새는 허공을 꽉 채운 채 제 위력을 과시했다. 이제 세입자들은 그 냄새를 참아 낼 수가 없을 지경이 되고 말았다.
―「끝말잇기」에서
집 안이 너무 적막했다 메리가 움직이면서 방바닥이 긁히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꺄옹꺄옹 하는 애교 섞인 우는 소리도 더 이상 없었다. 진국은 전혀 다른 공간에 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텔레비전을 틀어 놓고 멍하니 시간을 보내다 진국은 휴대전화를 들고 연락처를 뒤졌다. 진국이 제일 먼저 전화를 건 사람은 안산에서 빌라를 지어 팔 때 분양을 맡았던 상록이었다. 두 번 정도 벨이 울리는가 싶더니 뚜뚜 소리와 함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음으로 진국은 자신이 짓는 발라마다 감리를 맡아 처리해 줬던 영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그 역시 연결음 없이 뚜뚜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진국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분홍 코끼리」에서
우리는 아버지가 옮겨 갈 병원을 찾는 일부터 병원비 지불 문제, 간병인을 구하거나 휴무일에 교대를 해 주는 문제까지 사사건건 부딪쳤다. 누구도 손해 보지 않고 공평하게 일과 비용을 나누려고 했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공평해지지 않았다. 서로 뭘 그리 잘했느냐고 다투다가, 네가 사람이냐를 따지다가, 세상 둘도 없이 몰염치하고 인정머리 없는 새끼라고 언성을 높였다. 우리가 주고받는 얕은 말들은 점점 더 강도가 높아졌다. 저 새끼 내가 죽이고 나도 죽고 말지, 싶은 충동이 손끝에서 떠나지 않아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개와 당신의 이야기」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