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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예술/대중문화 > 미술 > 미술가
· ISBN : 9788950966072
· 쪽수 : 384쪽
· 출판일 : 2016-08-01
책 소개
목차
추천의 글
저자의 글
프롤로그
CHAPTER 1
예술가 백남준과 조우하다
나의 예술적 이상향, 반항아 백남준
희대의 문화테러리스트
전쟁과 파인애플
예술적 아버지 존 케이지
TV예술, 새로운 세계와 사랑에 빠지다
<연애편지>에 받은 답장
CHAPTER 2
거침없이 플럭서스
뉴욕에서의 재회
우리의 실험, 코뮌 라이프
아방가르드 파트너, 샬럿 무어맨
버자이너 페인팅
외설과 예술 사이
천재 예술가를 사랑한다는 것
캘리포니아 드림은 없다
소호 탄생의 비밀
CHAPTER 3
뉴욕을 강타한 황색재앙
큐레이터 시게코의 헌신
가난한 플럭서스 커플
TV 부처, 동양과 서양의 만남
달빛은 높은 예술, 백남준은 낮은 예술
나의 뒤샹을 질투한 남자
한국 남자를 좋아하는 유전자
슬픈 결혼식
CHAPTER 4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새로운 쇼
소름 돋는 천재와 세 살배기 아이
독일의 감격시대
34년 만의 금의환향
한국 무덤에 반하다
지상 최대의 쇼를 하라
그의 안에 무당이 있다
다다익선, 거대한 TV 탑을 세우다
CHAPTER 5
부처, 야곱의 사다리를 오르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
비디오 아티스트의 숙명
손이 천 개 달린 부처
백악관에서 바지를 내리다
거장, 야곱의 사다리를 오르다
예기치 못한 상처
고향에 가고 싶다
그가 떠나던 날
백남준의 고향
백남준과 함께한 나의 삶
에필로그
백남준 연보
구보타 시게코 연보
도판리스트
참고문헌
리뷰
책속에서
늘 그렇듯 클라이맥스는 마지막에 왔다. 그는 자신이 신고 있던 가죽 구두를 벗어 들었다. 그러더니 그 안에 물을 콸콸 따르고는 단숨에 마셔버렸다. 신발의 고린내가 객석까지 날아오는 듯했다. 보기만 해도 참을 수 없는 욕지기가 목구멍을 타고 스멀스멀 치밀어 올라왔다. 빨아먹듯 구정물을 마셔버린 그는 갑자기 무대 뒤로 사라졌다. 십여 분이나 지났을까. 어디선가 적막을 찢는 듯한 벨소리가 울려 퍼졌다. “공연은 끝났다”고 알리는, 공연장 외부에서 걸려온 느닷없는 전화였다.
1964년 5월 29일, 그날은 내가 기사로만 접했던 남준의 공연을 처음 본 날이었다. 마치 폭풍이 휩쓸고 간 것처럼 파괴적인 공연이었다. 보는 내내 숨이 멎는 것처럼 긴장이 되었다. 공연이 끝난 뒤에도 한참이 지나도록 광기 어린 몇몇 장면들이 공포영화의 잔상처럼 남아 머릿속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 <나의 예술적 이상향, 반항아 백남준> 중에서
드디어 남준의 네 번째 개인전이 열리는 날, 보니노 갤러리를 찾은 평론가와 언론, 관객들은 그의 작품 앞에 몰려들었다. 가부좌한 부처상 앞에 TV가 있고 TV 뒤에는 비디오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 화면에 부처의 모습이 나오게 만든 <TV 부처>였다. 단순한 배치만으로 부처가 TV 화면에 나오는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깊은 상념에 빠진 듯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이제껏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아니 아예 상상도 하지 못했던 독특하고도 복합적인 작품이었다. 평론가들은 동양의 선禪과 서양의 테크놀로지가 만난 기념비적인 비디오아트의 탄생에 열광했다. 남준의 명성이 뉴욕 예술계의 지축을 흔들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 <TV 부처, 동양과 서양의 만남> 중에서
작품 창작과 관련해서 하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게 있으면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한꺼번에 수백 대의 TV를 사는 것은 제쳐놓더라도 작품을 위해서라면 말 그대로 돈을 물 쓰듯 쓰면서 전혀 아끼지 않았다. 당연히 작품을 만들 때면 뉴욕 최고의 엔지니어와 비디오 에디터를 불러야 직성이 풀렸다. 별달리 모아둔 돈이 없는데도 말이다. 그는 가끔 자신의 이러한 금전적 무절제를 정당화하기도 했다.
“어머니가 그랬어. 돈은 물처럼 써야 한다고.”
당장 밥값, 월세가 걱정되는 상황에서 돈을 물처럼 쓰니 말싸움이 없을 수가 없었다. 내가 가끔 투정이라도 부리면 곧바로 퉁명스런 대답이 날아왔다.
“난 예술가야! 돈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내가 부자였다면 어떻게 예술가가 됐겠어! 당신이 안락한 삶을 원했다면 완전히 잘못 결혼한 거야.”
- <소름 돋는 천재와 세 살배기 아이> 중에서
몇 걸음 더 내딛기도 전에 한 무리의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러고는 쉴 새 없이 질문들을 쏟아냈다.
“이번 여행 목적은 뭡니까?”
“한국 미인을 만나러 왔습니다.”
남준의 대답에 “와” 하는 웃음이 터졌다.
“한국에 와서 할 일은 계획해 두셨나요?”
“아버지와 어머니 산소에 가고, 가족 만나고, 동창생들도 찾아봐야지요. 내 동창이 서울시장 됐다는데 한턱내라고 할 작정입니다. 유치원 짝도 만나보렵니다.”
“왜 조국을 놔두고 외국에서만 활동합니까?”
“문화도 경제처럼 수입보다 수출이 필요해요. 나는 한국의 문화를 수출하기 위해 외국을 떠도는 문화 상인입니다.”
“백 선생님은 예술을 왜 하십니까?”
“인생은 싱거운 것입니다. 짭짤하고 재미있게 만들려고 하는 거지요.”
- <34년 만의 금의환향> 중에서
남준이 성공한 예술가가 되어 34년 만에 다시 고국을 찾았을 때 많은 한국 사람들이 그의 정체성을 놓고 혼란스러워했다. 겉모습만 한국인인가? 뉴욕이 활동 본거지고 유럽과 미국에서 더 유명하니 미국인 아닐까? 한국전쟁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대학을 다니고 일본인 아내까지 얻었으니 반은 일본 사람일 거야…….
그러나 내가 지켜본 바로는 그는 천생 한국인이었다. 김치나 된장찌개를 매일 먹지 않았을 뿐, 자신의 내면에 자리한 한국인의 문화적 유전자와 어린 시절의 추억들을 마음속 보물상자처럼 간직한 채 그것을 작품 속에 녹여 왔다.
- <고향에 가고 싶다> 중에서
갑자기 분위기가 돌변했다. 사회를 보던 조카가 돌연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고인을 위해 마지막 퍼포먼스를 하자”고 말을 꺼내더니, “옆 사람의 넥타이를 잘라 관 속에 넣어달라”고 주문했다.
숙연하던 영결식장 곳곳에서 조문객들의 밝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오노 요코가 가장 먼저 조카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넥타이를 싹둑 잘랐다. 이를 신호로 여기저기서 조문객의 넥타이를 자르는 일들이 벌어졌다. 조문객들은 잘린 넥타이를 들고 줄을 섰다. 그러고는 고요하게 잠들어 있는 남준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한 뒤 울긋불긋한 넥타이 조각을 그의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백남준의 고향> 중에서
예술적 감성과 재능, 인간적 매력을 함께 갖춘 이 우주적 천재를 어디서 다시 만날 수 있겠는가. 그의 광채가 너무 눈부셔 함께 예술을 하는 아내로서 주눅들 때도 있었지만, 이런 그늘이 또한 나를 예술가로서 더욱 정진하게 하는 자극이 되었다. 가난하던 시절, 돈에 대한 개념이 없이 비싼 TV를 수백 대씩 사들이던 그 때문에 나는 더 가난하게 예술을 해야 했지만, 그의 작품이 하나씩 탄생하는 것을 볼 때마다 너무 경이롭고 신기해 모든 아픔을 잊고 그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던 나를 발견하곤 했다. 그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옆에서 간호하느라 작품 창작은 아예 손 놓고 있었지만, 그래서 남준이 무척 미안해했지만 나는 후회나 미련이 없다. 남준과 함께 사는 것 자체가 내게는 ‘아트’였으므로.
-<백남준의 고향>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