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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추리/미스터리소설 > 기타국가 추리/미스터리소설
· ISBN : 9788952214867
· 쪽수 : 512쪽
· 출판일 : 2010-08-02
책 소개
리뷰
책속에서
젠장. 까맣게 잊고 있었다. 금발의 자그마한 여자가 점심시간 직전에 찾아왔는데, 점심 먹으러 나가려고 서둘러 돌려보냈던 기억이 났다. 친구가 실종되었다는 신고는 대부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고주망태가 되어 도랑에 빠졌거나, 이름 모를 남자와 먼저 집으로 가서 사라진 경우가 태반이었기 때문이다. 망할. 이제 대가를 치르게 되겠군. 왜 어제 발견된 여자를 그 일과 연관시키지 못했는지 알 도리가 없었지만,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제 중요한 것은 피해를 최소화하는 일이었다.
“아, 그렇지, 그랬던 것 같네.”
“그랬던 것 같다구요?” 평소에는 차분했던 파트리크의 목소리가 작은 방을 쩌렁쩌렁 울렸다. “신고를 접수하셨든지 안 하셨든지 둘 중 하납니다. 그것 말고는 없어요. 그리고 신고를 접수하셨다면, 도대체 어디에…… 보고서는 어디 있습니까?” 파트리크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말을 더듬고 있었다. “이것 때문에 수사가 얼마나 지연됐는지 아세요?”
“어, 정말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내가 어떻게 알았겠?”
“아실 필요 없습니다. 맡은 일만 하시면 되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합니다. 지금부터는 일분일초를 아껴야 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에른스트는 목소리를 최대한 유순하게 내면서 뉘우치는 모습을 보이려고 애썼다. 속으로는 애송이처럼 설교를 듣는 처지가 되었다고 구시렁거렸지만, 지금은 파트리크가 멜베리의 오른팔 노릇을 하는 듯하니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바보짓은 하지 말아야 했다.
오한이 난 그녀는 갑자기 자신이 팬티를 제외하면 알몸 상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몸이 쑤시고 떨렸다. 그녀는 팔로 몸을 감싸 안고 무릎을 턱까지 끌어당겼다. 이제는 공황 상태보다 더 무시무시한 공포가 뼛속까지 갉아먹고 있었다. 어떻게 여기 왔지? 왜 온 거지? 누가 옷을 벗겼지? 마음은 그녀에게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을 알고 싶지 않으리라고 속삭였다. 뭔가 나쁜 일이 벌어졌는데 정작 무슨 일인지는 모른다는 사실이 공포를 배가시켜서 온몸이 마비될 지경이었다. 그때 가느다란 빛줄기가 그녀의 손을 비췄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눈을 들어 빛이 새어 들어오는 곳을 보았다. 벨벳 같은 어둠 속에서 작은 틈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보였다. 그녀는 억지로 일어서서 도와 달라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발끝으로 서서 빛이 들어오는 곳에 닿으려고 애썼지만 가까이 가지도 못했다. 그런데 위로 향한 얼굴 위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물방울이 흐르는 물로 바뀌자, 갑자기 목이 말랐다. 그녀는 별 생각 없이 물을 마시려고 입을 벌렸다. 처음에는 물이 대부분 얼굴로 흘러내렸지만, 이내 방법을 터득한 그녀는 게걸스럽게 물을 마셨다. 얼마 후 모든 것이 뿌옇게 보이더니, 세상이 빙빙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왔다.
파트리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이 뭐라고 대답하든 군 스트루베르는 고마워하지 않을 테니까. 도대체 이 여자는 왜 아이 아버지가 자기에게 돈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자기가 얼마나 부당하게 행동하는지 모르나? 보아하니 모르는 것 같았다. 군의 그을린 가죽 빛깔의 뺨은 분노로 벌게져 있었다. 자기 딸이 20년도 더 전에 죽었다는데도.
그는 시브에 관한 개인적인 정보를 알아내고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질문했다. “사진 좀 볼 수 있을까요?”
“흠, 걔 사진을 많이 찍진 않았지만, 몇 장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군이 거실에서 나가자, 파트리크는 라르스와 둘만 남게 되었다. 그들은 몇 분 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이윽고 라르스가 뭐라고 말했다. 군이 듣지 못할 만큼 낮은 목소리로.
“아내는 겉보기만큼 무정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주 좋은 면도 있어요.”
아, 그럼요. 파트리크는 속으로 대꾸했다. 어리석은 변호라고나 할까. 그러나 라르스는 아내를 선택한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는 군보다 스무 살 정도 많아 보였는데, 그런 경우 나이 많은 남자가 머리보다는 몸이 이끄는 대로 선택했다고 추측해도 부자연스럽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파트리크는 자신이 직업 때문에 조금 냉소적인 사람이 되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참사랑일 수도 있으니까. 그가 어떻게 알겠는가?
군은 알베르트처럼 두꺼운 사진 앨범을 가져오는 대신, 조그만 흑백사진을 달랑 한 장 가져와서는 부루퉁한 얼굴로 파트리크에게 건넸다. 십 대의 시브가 갓난아기를 무릎에 앉힌 채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진이었다. 모나의 사진과는 달리, 이 사진에 찍힌 소녀의 표정에서는 기쁨을 찾아볼 수 없었다.
“에, 우린 집을 청소해야 해요. 라르스의 딸이 사는 프로방스에서 막 돌아왔거든요.” ‘딸’이라고 말할 때 목소리로 미루어, 군과 그녀의 의붓딸은 서로 미워하는 모양이었다.
파트리크는 떠날 때가 됐음을 깨닫고, 두 사람에게 도와줘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사진을 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흠 없는 상태로 돌려 드리겠습니다.”
군은 시큰둥하게 손을 흔들다가 자신의 역할을 기억해 내곤 얼굴을 찌푸려서 우거지상을 만들었다.
“신원을 확인하면 바로 알려 주세요. 내 딸 시브를 정말 제대로 묻어 주고 싶으니까요.”
“소식 듣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파트리크는 불필요하게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과장된 쇼가 상당히 불쾌했다.
노라 함가탄으로 다시 나와서 보니,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했다. 그는 잠시 가만히 선 채로, 스트루베르 부부를 만나면서 느낀 역겨움이 폭우에 씻겨 내려가게 했다. 집에 가서 에리카를 안고 그녀의 배에 손을 얹어 그 안에서 팔딱거리는 생명을 느끼고 싶었다. 세상이 그렇게 잔인하고 사악하지는 않다고 느끼고 싶었다. 이 세상이 정말 그래서는 안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