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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추리/미스터리소설 > 일본 추리/미스터리소설
· ISBN : 9788952762375
· 쪽수 : 300쪽
책 소개
목차
제1장 서(序)
제2장 기(起)
제3장 승(承)
제4장 소(遡)
제5장 미(微)
제6장 계(?)
제7장 채(彩)
제8장 파(破)
제9장 우(迂)
제10장 일(逸)
제11장 완(緩)
제12장 희(戱)
제13장 급(急)
제14장 곡(曲)
제15장 전(轉)
제16장 착(錯)
제17장 해(解)
제18장 결(結)
제19장 여(餘)
작품 해설
옮긴이의 말
책속에서
결코 잊을 수 없다. 나와 시게키(重樹)가 함께 여덟 살을 맞이한 해의 여름이었다. 나는 시게키를 미끄럼틀 중간에서 발로 밀어 떨어뜨려 그를 기형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일생을 망치고 말았다.
나쁜 뜻은 없었으며 애당초 밀어 떨어뜨리려고 한 것도 아니었다. 높이가 4미터인 그 미끄럼틀은 내려오는 도중에 경사가 완만해지면서 물결 모양으로 구부러졌다. 먼저 미끄러져 내려간 시게키는 구부러진 부분에서 내려가는 힘이 약해지는 바람에 미끄럼틀 중간에서 멈춰버렸다.
나는 미끄럼틀의 경사가 완만한 탓에 자칫하면 도중에 멈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시게키가 아래까지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을 확인하지도 않고 위험천만하게도 엉덩이 아래에 롤러스케이트를 깐 채 시게키의 뒤를 이어 미끄럼틀을 탔다.
다리를 쭉 뻗은 채 엄청난 기세로 내려가던 나는 신발 바닥으로 시게키의 엉덩이를 세게 걷어찼고, 공중으로 튀어 오른 시게키는 약 2미터 반 정도의 높이에서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시게키는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높이 10센티미터짜리 미끄럼틀 받침대 모퉁이에 척추를 부딪힌 채 옴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시게키의 부모님은 그를 즉시 구마자와 종합병원으로 데려갔지만, 진찰 결과는 우리에게 그야말로 비참한 비극이었다. 의사는 시게키의 하반신이 더는 성장하지 않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방에 나 혼자다. 이게 뭐람. 나 혼자뿐이잖아. 히로코도, 노리코도, 방에 혼자 있을 때 살해당했는데. 이럴 때 살인귀가 들이닥치면 어떻게 하지. 이 방에 엄마와 함께 올걸 그랬어. 하지만 엄마는 엄마대로 준비를 해야 하니까.
빨리 해야지. 아아, 아직도 화장품이 잔뜩 있네. 화장대 위와 화장실에. 왜 이렇게 산더미처럼 가지고 왔을까.
이 별장은 저주받았어.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괜찮을 거라는 기분이 든다. 여기에 있는 한 죽음이 덮쳐올 거야. 경찰들이 있어 봤자 살해당할 지경이니. 또 다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무서워.
바람이 불어들어 왔다. 왜일까. 허리가 서늘했다. 유리문은 닫혀 있고, 커튼도 쳐져 있다. 어디서 바람이 들어오는 걸까.
벽에 댄 널빤지 한 장이 움직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로트레크의 〈라 지타느〉 포스터 아래의 널빤지다. 옆으로 빗겨나가 있었다. 빈틈이 생겼다. 바람은 거기서 들어왔다.
아아. 누군가의 손가락이 널빤지 가장자리에 걸려 있다. 노란 고무장갑을 낀 손가락. 그 손가락이 널빤지를 조금씩 옆으로 옮기고 있다. 범인이 틀림없어. 살인귀야. 들어오려는 거야. 나를 죽이려는 거구나. 이런 곳에 비밀통로가 있었어.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비밀로 가득한 저택이야. 무섭다. 무서워. 무서워서 어찌 할 도리도 없다. 역시 이 낡은 저택은 저주받았어. 모르는 비밀통로와 숨겨진 방이 잔뜩 있어서, 경찰이 아무리 많아 봤자 살해당하는 거야.
널빤지가 천천히, 조금씩, 벌써 10센티미터 넘게 열렸다. 틀림없어. 나는 살해당할 거야. 살, 려, 줘……. 외치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나는 방 한가운데 서서 꼼짝도 하지 못한 채 입을 뻐끔뻐끔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