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기독교(개신교) > 기독교(개신교) 신앙생활 > 간증/영적성장
· ISBN : 9788953119437
· 쪽수 : 364쪽
책 소개
목차
추천의 글
서문
Part 1 세상, 예수를 오해하다
1 야망을 내려놓으면,
예수가 보인다
2 역사의 수수께끼들을 걷어 내면,
예수가 보인다
3 규격화된 종교의 틀을 깨뜨리면,
예수가 보인다
4 시대의 짐을 벗어 버리면,
예수가 보인다
5 하나님의 열망을 알게 되면,
예수가 보인다
Part 2 톰 라이트, 1세기 예수를 만나 배우다
6 세상,
탐욕과 편견이 난투극을 벌이다
7 왕의 오심,
미처 생각지 못했던 위대함이 몰려오다
8 통치,
인간 영혼의 깊은 곳에서 시작되다
9 하나님 나라,
충분하다 그래서 더욱 기대되다
10 영적 싸움,
세상과 가장 본질적인 전투에 임하다
11 비전,
온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새 출발을 꿈꾸다
12 왕의 입성,
예언이 성취되다
13 십자가 죽음,
우주의 초석이 되다
14 새로운 통치,
가슴 벅찬 약속 그리고 희망을 맛보다
Part 3 예수, 온 세상의 왕이 되다
15 지금 여기,
예수와 함께 다스리다
주
리뷰
책속에서
나사렛 예수는 생애가 다한 지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과 도전을 던진다. 질문은 아주 단순하다. 그분은 정확히 누구였는가? 여기에는 이런 질문들이 포함된다. 그분은 자신이 하시려는 일이 무엇이라 생각했는가? 그분이 하신 일과 말씀은 무엇인가? 그분은 왜 죽으셨는가? 과연 죽음에서 부활하셨는가? 마찬가지로 도전도 아주 단순하다. 그분은 사람들을 불러 자신을 따르게 하셨고, 사람들은 그 뒤로 그분을 따르려 했다. 그렇다면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바른 길로 가고 있는지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
개인적으로 평생 그런 의문들로 고민해 왔고 다양한 각도에서검토하고 답을 찾아왔다. 이는 내게 도전이자 또한 기쁨이었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면서 유년기부터 성인기까지 신앙이 자라고 깊어지는 것을 경험했다. 그러는 내내 의식한 소명이 있었다. 나는 초대 기독교의 역사와 사상을 전공한 역사가, 신학자, 교사, 작가로 부름 받은 동시에 또한 교회 목사로 부름 받았다. 현대 문화는 대개 그 소명을 둘로 나누지만 나는 일관되게 하나로 본다. 학문과 목회라는 요소를 어떤 때는 하나로 융합할 수 있었지만 어떤 때는 맡은 일의 성격상 어쩔 수 없이 둘 중 하나에 치중하느라 균형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는 차차 바로잡아 갔다. 이런 자전적 회상은 이 책의 주제와 분명히 연관 있다. 예수에 관한 글쓰기는 내게 단순히 ‘중립적’ 역사 공부의 문제였던 적이 없다(사실 주제가 무엇이든 그런 중립이란 존재하지 않지만 그 문제는 일단 접어 둔다).
Simply의 의미?
개인적으로 연구하는 역사적인 인물 예수는 곧 내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으로 예배하는 바로 그 예수다. 그와 같은 맥락으로, 예수에 대한 글쓰기는 내게 단순히 목회와 설교를 위한 문제였던 적이 없다. 내가 설교하는 예수는 곧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실제로 살다 죽으신 그 예수다. 현대 서구 특히 미국 문화는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예수, 두 인물을 어떻게든 서로 갈라놓으려 한다. 양쪽 진영의 요란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그런 추세에 저항하며 왔다. 「톰라이트가 묻고 예수가 답하다」(Simply Jesus)라는 책 제목은 이전에 나온 「톰 라이트와 함께하는 기독교 여행」(Simply Christian)에 이어 일부러 그렇게 지었다. 하지만 단순성과 지나친 단순화는 다르다.
흔히 대중 강연을 하면 질문 시간에 “아주 단순한 질문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고는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하나님은 정확히 누구입니까?” “창조 전에는 무엇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왜 악이 존재합니까?” 그런 질문에 내가 늘 답하듯이, 질문은 단순할지 몰라도 답변은 그렇지 않다. ‘단순한’ 답을 내놓으려다 자칫 사안을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우스운 꼴이 될 수 있다. 누군가 어거스틴에게 하나님이 창조 전에 무엇을 하고 계셨느냐고 묻자 그는 실없는 질문이나 던지는 사람들을 위해 지옥을 만들고 계셨다고 답했다. 단순성은 훌륭한 미덕이지만 지나친 단순화는 게으름의 징후이며 오히려 악덕이다.
매우 흔한 문제다. 예컨대,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 앞에 있는데 어떤 운전자가 차를 세우고 이렇게 묻는다고 치자. “여기서 글래스고로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합니까?” 질문은 단순하지만 답변은 그렇지않다. 만일 “계속 서남쪽으로 가면 나옵니다”라고 대답하면 대체로 맞는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표지판이 잘 되어 있다 하더라도 길들이 곧지 않기 때문에 엉뚱한 길로 빠지기 쉽다. 적어도 이런 내용을 미리 일러 주면 도움이 될 것이다. 중간에 큰 강이 나오는데, 좁은 지점도 너비가 1.5킬로미터쯤 되며, 거기서부터 내륙으로 먼 길이 이어진다.
강을 건너는 다리는 강풍 때문에 폐쇄될 때가 있으나 우회로가 있어 여러 소읍과 마을을 지나고 한두 개의 산자락을 돌아가면 된다. 운전자는 그 순간에는 그렇게까지 자세히 알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대충이라도 주의를 주지 않는다면 지나친 단순화일 수 있다. 어느 마을에서 길이라도 잃으면 운전자는 ‘단순한’ 대답을 원망할지도 모른다. 약간 복잡한 설명이 오히려 도움이 되었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 책을 쓰는 개인적인 심정도 비슷하다. 예수에 대한 ‘단순한’ 책을 쓰려고 시작했다. 하지만 예수는 당대에도 단순하지 않으셨고 지금도 단순하지 않으시다. 나는 거의 항상 예수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고 설교했다. 특히 예수와 그분을 따르려는 씨름이 현실 속의 인생들과 공동체들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줄지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정말 예수께로 가는 길 을 찾으려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을 최대한 단순하게 차근차근 종합하기로 했다. 정말 있는 그대로의 예수께로 가면 그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 자신께로 가는 길과 ‘예수를 따르는’ 삶의 의미까지 발견할 것이다.
내 아버지도 이해할 수 있는 책
이 책은 사랑하는 아버지가 91세에 돌아가신 뒤로 내가 처음 쓴 책이다. 본래 아버지는 신학이나 성경학에 관한 책을 거의 혹은 전혀 읽지 않으시던 분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60대 중반일 때 내가 글을 쓰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아버지는 내 모든 글을 간행된 지 며칠 만에 읽고는 자주 전화를 걸어 소감을 들려주었다.
한번은 “사전에서 ‘종말론’을 세 번이나 찾아봤는데도 자꾸만 뜻을 까먹는구나”라고 푸념하신 적도 있다. 부활에 관한 두꺼운 책이 나왔을 때는 전체 700쪽을 사흘 만에 읽고는 600쪽쯤부터 책이 정말 즐거워지더라고 말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생의 끝을 눈앞에 두고 있다 보니 희망이 활자로 그치지 않고 비로소 자신의 것으로 ‘체험’되었을 것이다. 특히 대중을 상대로 한 책들의 경우, 아버지가 내 잠재의식 속에 늘 ‘대상 독자’였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이제 읽어 주실 아버지가 없으니 책을 쓰면서도 기분이 다르다. 어쨌든 아버지가 나한테서 몇 가지를 배우셨기를 바라지만, 이 책과 특히 마지막 장에는 내가 아버지한테서 배운 많은 것들 중 일부가 묻어난다. 아버지의 소천을 애도하며 감사와 사랑과 물론 희망을 담아 이 책을 아버지의 영전에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