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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기독교(개신교) > 기독교(개신교) 신앙생활 > 사랑/결혼
· ISBN : 9788953126411
· 쪽수 : 244쪽
책 소개
목차
프롤로그
Part 1 연애, 하고 싶다 첫 끌림에서 영혼의 어우러짐까지
[첫 끌림] 이 끌림이 진정한 사랑일까
[설레는 연애] 때가 될 때까지 사랑을 키우지 마라
[불 같은 구애] 결혼에 관한 비전을 나누다
[사랑 깊은 약속] 결혼, 두 영혼의 어우러짐이다
Part 2 드디어 결혼, 하다 더 사랑하고 더 성장하기 원하는 부부들을 위해
[친밀함] 결혼의 목표는 ‘한 몸’이 되는 것이다
[갈등] 서로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다
[부부 사랑] 식어가는 불에 관심의 장작을 넣으라
[함께 늙어가는 삶] 독이 되는 결혼은 없다, 복이 되는 결혼만 있다
에필로그
감사의 말
주
책속에서
“이 끌림이 진정한 사랑일까?”
끌림은 성경적으로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끌림은 이상하고도 모호한 요인이다. 심리학 사전(PsychologyDictionary)은 ‘끌림’을 이렇게 정의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끌리고 그들과 어울리길 원하는 자연스러운 감정. 이것은 대체로(반드시는 아니지만) 그들을 개인적으로 좋아해서 생기는 감정이다.”1 약간 모호한 정의이긴 하지만, 위에서도 말했듯이 끌림이란 본래 모호한 요인이다. 이성으로서든 아니든 우리가 누군가에게 끌리는 것은 그에게서 ‘특별한 뭔가’가 보이기 때문이다. 대개 그 뭔가는 어느 한 가지 요소가 아니라 성격이나 인상 같은 다양한 요소의 결합이다. 세상에는 외모적으로 아름다운 사람도 많다. 그러나 우리는 육체적인 매력 이외에 뭔가가 느껴지는 이성에게 끌린다
그럼에도 육체적인 매력을 빼놓고 끌림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사실, 요즘 사람들이 “매력적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대개 육체적 매력을 말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잘생겼다는 뜻이다. 남녀 모두에게, 특히 남자들에게 첫 끌림은 상대방의 인격이나 능력과 별로 상관이 없다. 처음에는 단순히 생김새가 맘에 들어서 끌리기 쉽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생김새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인격을 알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 일단 우리의 눈은 방 안에서 가장 잘생긴 사람에게로 향하게 되어 있다. 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인데 잘 모르는 사람이 있어서 말하면, 누군가에게 육체적으로 끌리는 것은 전혀 나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완벽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사실, 아가서도 육체적 끌림으로 시작된다. “내게 입 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 로구나”(1:2). 아가서의 여인은 솔로몬을 보자마자 반해 그에게 입을 맞추기 원했다. 그녀에게 솔로몬은 바라보기만 해도 즐거운 존재였다.
성경은 이성간의 육체적 끌림을 묘사할 뿐 아니라 ‘인정’한다. 창세기 2장에서 아담이 하와를 보자마자 사랑의 노래를 불렀던 것에서부터 창세기 29장 17절에서 야곱이 라헬을 보자마자 반해 “곱고 아리따우니”라고 감탄했던 것까지, 성경은 육체적 끌림에 반대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중략) 육체적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취향이 각양각색인 것을 통해 하나님의 창의성과 예술 감각을 예상해 볼 수 있다.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 눈에 안경인 사람을 찾아내는 것을 보면 우리 안에 미에 대한 안목(더 깊은 차원에서 말하면, ‘영광’에 대한 안목. 물론 영광의 최고봉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다)을 심어 주신 하나님의 솜씨가 얼마나 뛰어난지 모르겠다. 사람이 이성에게 육체적으로 끌리는 것은 생리적으로도 성경적으로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것은 선하고도 정상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성경은 육체적 끌림을 인정하는 동시에 주의를 요한다.
가정을 구원할 빛은 구주 안에 있다
수세기 동안 아가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었다. 한 쪽 극단에서는 너무 비유적으로 해석하고, 다른 쪽 극단에서는 철저히 실용적인 교과서로 해석했다. 하지만 나는 양극단이 아닌 중간 어디쯤에 진실이 있다고 믿는다. 물론 아가서에서 우리는 로맨틱한 사랑과 결혼, 성에 관한 많은 실용적인 팁을 얻을 수 있다. 아가서는 ‘시’이면서 동시에 매우 실용적이다. 그래서 실질적인 결혼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은유적으로만 아가서를 해석해서는 곤란하지만, 아가서에서 우리는 이 땅에서의 결혼을 넘어 저 하늘에 계신 분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아가서가 복잡하고 불가해하듯 결혼도 복잡하고 불가해하다. 이에 대해 바울은 구약의 구절을 차용하여 이렇게 표현했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 5:31-32).
결혼생활을 꽤 오래 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결혼이 비밀처럼 알쏭달쏭한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살아도 살아도 모르는 것이 결혼이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결혼에 대해 잘 아신다는 것이다.
우리를 놀라게 하고 다급하게 만드는 것들이 하나님을 당황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모든 것을 이미 알고 계시기에 놀라시는 법이 없다.
배우자의 손을 잡고 빛을 찾아 어둠 속을 헤매고 있는가? 그 빛은 서로의 눈 속에 있지 않다. 서로를 향한 사랑의 불 속에 있지 않다. 빛은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구주 안에 있다. 결혼을 단순히 남녀가 같이 사는 것으로만 보지 않고 신부를 향한 그리스도의 깊고도 희생적이고도 영원한 사랑을 볼 수 있다면 진정으로 눈이 열린 것이다.
언젠가 죽음을 통해서든 우리 주님의 재림을 통해서든 우리의 결혼은 끝이 날 것이다. 우리의 결혼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하지만 결혼생활을 통해 우리의 영혼 속에서 이루어지는 성화는 영원하다. 언젠가 우리는 남편을 사모하는 신부처럼 우리의 구속자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분을 대면하는 순간, 우리는 결혼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는 결혼이라는 불가해의 신비를 즐기자. 결혼은 놀라운 선물이요 심오한 은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