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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88954637466
· 쪽수 : 120쪽
· 출판일 : 2015-11-15
책 소개
목차
시인의 말
고요 일가(一家)
오리나무부부
분천역에서
무명시인
향수다방이 있는 마을
겨울 동화
춘화
돌멩이
구화학교 1
구화학교 2
구화학교 3
그곳
세상에서 제일 긴 의자
은어
모란의 집
빨간 모자
설국(雪國)
헌인릉에서
구파발역에서 지축역까지
정선 국수
전과자
벽시계
귀향
물고기
화석
새우전(傳)
몽유도원도
나뭇가지
순옥이 누나 별
모형비행기
뒤꼍나무
간식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
지팡이
하학길
동춘천국민학교
산중여관 1
산중여관 2
산중여관 3
구름 위의 식사
불영사, 풍경에 쇠줄을 걸고 사는 물고기는
연꽃과 거북이
각화사
민들레
가을의 전설
산해경(山海經) 근처
눈이, 흰 양들이
봄여름가을겨울
칠월
춘천
생가
간이역
메기의 추억
결행(決行)
사랑채 소사(小史)
산다화(山茶花) 나무 사이로
청담동
저녁의 부메랑
홍길동
자작나무숲에서
해설|시간에 저항하는 기억
|양재훈(문학평론가)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그는 갔다 눈도 추운 듯 호호 손을 불며 내리는 어느 겨울,
가진 것이라곤 푸른 노트와 몇 자루의 연필밖엔 없었던
난 그가 연필을 내려놓은 것을 본 적이 없다
아니, 한 두어 번 부러진 연필을 깎을 때였을까
그가 연필을 들고 있을 때만큼은 언제나
바나나 같은 향기가 손에 와 잡히곤 하였다
그는 마을 어귀 가장 낮은 집에서 살고 있었다
마당엔 잎이 무성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밤낮없이 그는 푸른 노트에 무언가를 적어넣었다, 그러면
나비와 새 들이 하늘에서 날아와 읽고 돌아가곤 했다
그런 그를 사람들은 시인이라 불렀다 하지만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 이름은 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인기척이라곤 낙엽 같은 노트를 찢어대는 소리일 뿐
아니, 밤보다 깊은 울음소릴 몇 번 들은 적이 있었을까
난 그의 글을 읽어본 적이 없다 하기야
나무와 새와 바람과 별 들이 그의 유일한 독자였으니
세상을 위해 쓴 게 아니라 세상을 버리기 위해 쓴 시처럼
난 그가 집 밖을 나온 것을 본 적이 없다
잠자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먹는 것도 본 적이 없다
밤낮없이 그는 푸른 노트에 무언가를 자꾸 적어넣었다
더이상 쓸 수 없을 만큼 연필심이 다 닳았을 때
담벼락에 도무지 읽을 수 없는 몇 줄의 시를 새겨넣고
그는 갔다 눈도 추운 듯 호호 손을 불며 내리는 어느 겨울
무명시인
끝내 그의 마지막 시는 세상 사람들을 감동시키지 못했다
그 몇 줄의 시를 읽을 수 있는 것들만 주위를 맴돌았다
어떤 날은 바람과 구름이 한참을 읽다가 무릎을 치며 갔다
누군가는 그 글이 그가 이 세상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발표한 시라 하고
또 누군가는 그건 글도 시도 아니라고 했지만
더이상 아무도 귀에 담지 않았다
그가 떠난 집 마당, 한 그루 나무만 서 있을 뿐
도무지 읽을 수 없는 몇 줄의 시처럼 세월이 흘러갔다, 흘러왔다
-「무명시인」
할머니와 지팡이는 늘 함께 다녔습니다
인연을 맺게 된 건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로부터
한 달쯤이었나, 밭둑에 버려진 것을
할머니가 주워온 후부텁니다
어디 하나 성한 데 없는 몸을 잘 다듬어서
돌담 양지 바른 곳에 말렸는데
다음날 아주 튼튼한 지팡이가 되어 있더랍니다
그후부터 지팡이는 할머니가 잠들면
깰 때까지 밤새도록 마당에 서서 기다렸고
뒷간에 가실 때도 문고리에 기대어 떠나질 않았습니다
마실을 가는 날엔 늘 할머니보다
한 걸음 먼저 앞장을 서서 길을 살폈습니다
한눈을 팔지 않았고 딴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처음 지팡이는 한 뼘 정도 할머니보다 키가 컸는데
할머니 허리가 점점 꼬부라지면서
지팡이는 할머니보다 더 키가 커져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지팡이와 할머니 키가
딱 맞은 물결이 되어 언덕을 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저 보이지 않는 밑바닥에서 지팡이는
할머니와의 키를 맞추기 위해
진 길 마른 길 고르지 않고 다니면서
제 뼈와 살을 깎아댄 것이었습니다
더이상 할머니가 작아질 힘조차 없게 되었을 때도
지팡이는 불 꺼진 집 같은 할머니 곁을
한 걸음도 떠나지 않았습니다
할머니의 유언대로 시냇가가 잘 내다보이는
동네 어귀쯤에 하관을 하던 날
도대체 지팡이가 어떤 신통력을 발휘했는지
아버지를 불러 자신을 관 속에 넣게 했습니다
죽음까지 지팡이는 할머니를 따라간 겁니다
-「지팡이」 전문
먹고사는 일에 저만큼 떠밀린 시(詩) 한번 써보고
기척이라곤 소달구지처럼 삐걱거리는 바람 소리뿐인
저 먼짓길 끝까지 갔다가 돌아와보는 거
-「분천역에서」 부분
구파발역에서 지축역까지
한 이삼 분이면 사라지고 말 철길
이제는 근사한 차나 한 채의 아파트를 갖는 데에
가끔 사용되는 꿈, 어딘가에 흐르고 있을
배롱나무 노랫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본다
-「구파발역에서 지축역까지」 부분
내 미소의 갈피갈피에 꽂아준 겸손이 얼마나 큰 욕망의 북이었는지 알겠다
그간 걸었던 나의 한 걸음 한 걸음이 그 큰 북을 두들겨댔던 북채였으니
-「각화사」부분